짜배기유머 > 고사성어 > 중국역사 > 청(淸 1644~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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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관의 횡포와 함께 명조(明朝)의 몰락에 박차를 가한 것은 당파의 분쟁이었다. 처음에는 환관에 대항하여 설립됐으나 당쟁이 심해짐에 따라 타 당을 음해 하는데 많은 국력을 낭비하여 만주족(滿洲族)의 중국 지배를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주족은 국호를 청(淸)이라 명하고 1644년에 중국을 점령하므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됐다. 
 
청의 만주족은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한족을 강압, 자기네 풍속인 변발 등을 강요하는 등 한족과의 사에에 불화가 계속됐으나 성조(聖祖: 康熙帝), 세종(世宗: 雍正帝), 고종(高宗: 건룡제)으로 이어지는 1660∼1800년의 130여 년간, 훌륭한 통치를 보여 당시 중국에 있었던 예수교 선교사에 의해 그 내용이 유럽에도 소개됐고 이 때에 정비된 관료제도가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아편전쟁 (1839∼1842)·태평천국운동(1851∼1864)·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갔다. 

결국 1911년 손문(孫文) 일파의 혁명당에 의해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고 청나라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통치하게 된 청(淸)제국은 초기에는 명말(明末)의 혼란한 사회상이 여전히 지속됐지만,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후 통일제국 으로서의 긴반을 확고히 다지고 혼란한 사회를 정비하는데 성공했다. 

관제는 명조(明朝)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내각과 8부를 설치했으며 정부의 여러 관직에 원(元)대와는 달리 만주인뿐만 아니라 한인(漢人)도 등용하는 비교적 관대한 인사정책을 실시했다. 

외교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개방압력에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중국이 마침내 '양이(洋夷)'에게 굴복하고 반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학문적으로는 경서(經書)의 문헌학적인 비판을 통하여 사실의 진위(眞僞)를 밝히는 시에 문자의 시대적인 의미를 증명함으로써 경서 본래의 원의(原義)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널리 발전했다. 이러한 고증학의 영향은 다른 분야에도 파급되어 역사학·금석학·교감학(校勘學) 등의 고증적 방법에 의한 연구를 구하게 됐다. 

19세기 중반 두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1840년 아편전쟁, 1856년 애로우호 사건)으로 서양강국의 굴욕적인 문호개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청조(淸朝)는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이나 자강운동(自强運動)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내부의 권력투쟁과 이념의 변질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와중에 1884년 청불전쟁(淸佛戰爭),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의 패배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빼앗아가는 계기가 됐다. 
 
이 후에도 청조(淸朝)는 꺼져가는 왕조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많은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나 입헌운동(立憲運動) 등의 개혁운동을 추진했지만 서양열강의 압력과 청조(淸朝)의 독선적인 방법으로 말미암아 개혁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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