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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中華民國 1912~) 

1911년 민영철도를 국유화하여 제국주의 열강에게 매각하려는 청정(淸廷)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일어났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불씨는 무창(武昌)에서 혁명파가 청군을 대파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손문(孫文)은 혁명정부인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대통령(臨時大統領) 에 취임하고 이 해를 민국 원년으로 하였으며, 수도를 남경(南京)에 두었다. 
 
그해 2월 손문은 황제 퇴위와 내각책임제 실시, 남경에서의 취임 등을 조건으로 청정부의 내각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으며,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가 원세개의 강압에 의해 퇴위하게 됨에 따라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조(淸朝)는 268년만에 멸망하고 중국 최초의 공화정부가 수립됐다. 

청말 이래 중국경제는 국내정치의 혼란과 개혁정책의 부진, 서양열강의 침투로 인해 도로 악화됐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도시지역에서는 1919년 이후 민간자본이 점차 성장하고, 토지자본이 상공업과 금융업에 투자되어 발전이 촉진됐으나 농촌경제는 파탄일로였고, 농촌인구의 도시유입, 국내외 정치의 불안 등으로 중국사회는 혼미를 거듭했다. 

더군다나 원세개(袁世凱)는 열강을 배후에 업고 제국의 부활을 꾀했으며, 원세개가 죽은 뒤에는 군벌(軍閥)들이 열강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각지에서 할거했기 때문에 중국의 정치·경제적 모든 측면은 서양열강에 의해 좌지우지 됐다. 
 
이 당시의 모든 중국의 이권은 서양열강이 차지하고 중국은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은 동양의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민중의 자각은 크게 깨어있어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대학생의 주도로 일어난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애국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대전 후 파리강화회담에서, 일본이 과거 독일이 청조로부터 할양받은 산동지역의 권리를 양도받기로 합의한 것에 북경대학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됐다. 

북경정부는 학생구속과 탄압으로 이 운동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전국의 노동자, 상인계층이 가세하면서 결국 정부는 친일파 각료를 해직하고 파리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5·4운동의 성공은 중국민의 잠재력을 깨워주는 기폭제의 역할외에도 중국내에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셈이 된 것이다. 

5·4운동은 중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것이 국내의 군벌(軍閥)과 세계열강 제국 주의라는 것을 중국민중에게 분명하게 폭로했다. 
 
5·4운동을 통해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인 성장을 인식한 선진 상인 지식인·노동자가 철저한 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실행하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21년 7월 1일 드디어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원조를 얻어서 중국공산당 제 1기 전국대표대회(全國代表大會)가 치외법권 지대인 상해의 프랑스조계내(租界內) 여학교에서 개최했다. 
 
이후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과 2차에 걸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게 되지만 근본적인 이념의 차이로 갈라서게 된다. 

 
제 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은 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꾀하는 것이 유리한다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손문의 광동정부로서도 북벌(北伐)에 의한 국민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보다 강력하고 효율적인 당조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민당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증대됨에 따라 양측의 마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1927년 4월 장개석(蔣介石)의 상해 쿠데타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고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28년 10월 북벌의 완성으로 남경을 수도로 한 국민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중앙정부가 됨으로써 이른바 '남경시대(南京時代 : 1928∼1937)'가 개막됐다.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중국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1930년 12월부터 1934년 10월 사이에 다섯차례에 걸친 위초(圍剿)라고 부른 포위공격전을 감행했다. 

결국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은 역사적인 대장정(大長征)을 감행하여 소련에 가깝고 또 일본의 침략에 가까운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에 도착했다. 
 
이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의 9∼10만 주력부대가 6천 마일의 대행군을 계속한 끝에 겨우 7∼8천 명이 생존하여 남경정부의 전중국지배의 길을 열어 주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단결 강화와 생존에 대한 자신감을 높여주었고, 행군 과정에서 각지에 혁명의 씨가 뿌려짐으로써 후일 공산당의 집권을 위한 기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의 약화와 분열을 틈타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이 후 일본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상해와 열하(熱河)까지 진군했다. 

이에 중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장개석은 국내를 안정시킨 다음에 외적을 진압한다는 소위 안내양외(安內攘外)를 주장하면서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해기 때문에 학생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항일을 주장한 중국공산당측은 폭넓은 동조를 받았다. 

국민정부내에서도 장개석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장개석의 부하중 몇명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됐다. 이 사건이 서안사건(西安 事件)으로 이 후 국민당이 중국공산당과 다시 손을 잡는 제 2차 국공합작(國共 合作)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항전보다는 당 세력을 확장하는데 염두을 두었기 때문에 항일전쟁과 국공간의 교전이 병행되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결국 1944년 5월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나자 중국은 통일국가의 건설이 가장 중대한 과제로 등장했다. 전쟁 직후에는 장개석정부가 미국의 원조 덕분으로 공산당보다는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군의 유격전과 정치공작, 국민당의 내분과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부재, 인플레로 인한 군 사기의 저하 등은 국민당이 중국 본토를 공산당 에게 내어주고 1949년 대만으로 달아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침내 주석으로 선출된 모택동(毛澤東)은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 共和國)의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대륙을 석권한 중국공산당은 한국전쟁에 출병하는 등 어려운 사정에도 1952년 전국 토지개혁을 완성했다. 토지개혁 이후 농업생산량은 급속도로 향상되어 곧 전전(戰前)의 최고수준으로 회복됐다. 

이에 중국지도자들은 멈추지 않고 사회주의체제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삼반오반(三反五反)'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삼반오반이란 당(黨)·정(政)·군(軍)의 오직(汚職), 낭비(浪費), 관료주의 반대와 자본가의 뇌물증여, 탈세, 국가재산 탈취, 협잡, 경제기밀누설을 척결하기 위한 운동 이었다. 이 운동은 반혁명 잔재의 청산, 계급투쟁 등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기초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당 주도의 개혁, 정풍, 숙청 운동에 이어 모택동은 과도기 총노선을 제기하면서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했다. 제 1차 경제개혁에서는 모든 자원을 자본재 산업에 집중, 농업을 포함한 전체 경제를 중앙집권식 계획경제로 개조하여 부강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중에 중국 지도자들은 노동력의 활용을 극대화하는 문제를 등한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공업투자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실업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제 1차 5개년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 중국 지도부는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소련모델을 폐기하고 새로운 자력갱생의 발전정책을 채택하여 성장을 가속화하려는 모택동의 혁명이념은 현실을 무시한 너무나 급진적이고 모험적인 정책인 것으로 판명됐다. 
 
예컨대 지역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경작방식의 개혁은 오히려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왔고, 계획의 분산은 노동력과 기타 자원의 효율적 운영을 불가능하게 했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실패는 모택동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는데 이후 등장한 인물이 당시 당의 제2인자였던 유소기 (劉少奇)였다. 

유소기의 조정·완화정책은 경제의 회복을 가져와 그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는 것 같았지만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으로 모택동에 의해 숙청을 당하게 됨으로써 권력은 다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넘어갔다. 

유소기(劉少奇)·등소평(鄧小平)을 비롯한 우파 실무파를 숙청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1969년 4월 제 9기 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문화혁명을 일단 매듭짓고 임표(林彪)를 당부주석으로 승진시키면서 당규약에 그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규정을 삽입했다. 

그러나 문혁(文革)기간 동안 정치적 영향력이 급증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임표와 실질적인 중국의 실력자 모택동간에는 많은 문제에서 견해차를 보였다. 이에 모택동은 강청(江淸)을 중심으로 한 4인방(4人幇)을 권력핵심부에 포진 시킴으로써 임표를 제거하려 했다. 

궁지에 몰린 임표는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을 타도하려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1970년대 초 문혁의 휴우증에서 벗어난 중국은 경제 활성화가 당면 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이에 실각한 등소평을 비롯한 많은 실무파들이 속속 복권되게 되고 이것은 기존의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4인방은 1976년 1월 총리 주은래(周恩來) 추모로 일어난 군중시위 사건인 천안문사건(4·5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등소평을 지목해 1967년에 이어 그를 다시 실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사망하게 됨에 따라 주은래를 뒤를 이어 제2인자로 있던 화국봉(華國鋒)이 4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게 된다. 

화국봉은 4개 현대화계획이라는 대형 프로젝트 건설을 추진하여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을 가졌지만 중공업에 치중한 경제정책은 상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도외시 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경제중심의 실용주의 노선 표방으로 등소평을 비롯한 실무파들이 다시 대거 복권하게 되고, 이는 화국봉(華國鋒)을 위시한 온건 혁명세력과 주은래 노선을 계승한 등소평(鄧小平) 등 실무세력사이에 대립을 가져왔다. 

양측은 서로 열띤 논쟁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과 이념을 비방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모택동의 '단결혁명론(繼續革命論)'을 옹호한 화국봉보다는 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앞을 보자 - 해방사상(解放思想), 실사구시(實事求是), 당결일치(團結一致), 향간전(向看前) - 라는 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이 전당공작(全黨工作)의 지도방침으로 채택됨에 따라 화국봉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등소평을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쥐게 된다. 

등소평은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제를 부활하여 자기의 심복인 호요방 (胡耀邦)을 총서기로, 조자양(趙紫陽)을 총리로 각각 임명했다. 등소평체제의 확립과 함께 중국은 경제의 대외개방과 농촌경제계획에 들어가 중국적인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견지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대외개방을 천명하게 됨에 따라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보수파들은 이를 빌미로 개혁파를 맹공하게 되고 마침내 호요방(胡耀邦) 총서기가 물러나게 되면서 조자양(趙紫陽)이 총서기로 부각된다. 

1989년 4월 15일 호요방(胡耀邦) 전(前)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호요방에 대한 명예회복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하게 되고, 시민, 노동자, 지식인까지 이 시위에 참가하게 된다. 
 
4, 5월에 걸쳐 민주화요구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천안문에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시민, 학생 등 약 100만명이 연달아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온건파 조자양 총서기와 강경파인 양상곤(楊尙昆) 국가주석, 이붕(李鵬) 총리측이 대립하게 되고 여기에서 강경파의 우세로 1989년 6월 4일 새벽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한다. 
 
시내 각처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충돌로 학생 36명을 포함한 319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부상자가 3,000명, 계엄군측 부상자 6,000명(당국발표)을 발생시킨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행했다. 

천안문사태 이후 1990년 6월 제 13기 4중전회(中全會)서 조자양 총서기는 민주화시위를 지지,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강택민(江澤民) 상해시 당서기 겸 정치국위원이 총서기로 선출된다. 
 
11월 6∼9일의 5중전회(中全會)에서 등소평은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1990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직책이던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강택민 총서기가 두 직책을 승계했다. 

1990년 1월 11일, 북경시의 계엄령이 해제되고 천안문사태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천안문 사태와 소련의 붕괴로 보수파의 목소리가 커지자 개혁·개방체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1993년 3월 제 8기 전인대에서 개정된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의 가속화를 촉구했다. 

현재 중국은 등소평을 비롯한 개혁파가 추진하는 개방과 조정의 정책하에서 '현대화'·'민주화'·'문명화'·'사회의 강국'을 목표로 진군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서방 자본주의에 대해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은 중국 사회 전반에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산물들이 점차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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