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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 北夫餘 
시조 해모수(BC 239-BC 194) -> 2대 모수리(BC 194-BC 169) -> 3대 고해사(BC 169-BC 120) -> 4대 고(해)우루(BC 120-BC 108) -> 5대 고두막(BC 108-BC 59) -> 6대 고무서(BC 59-BC 58)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기 (迦葉原夫餘) 
시조 해부루(BC 86-BC 47) -> 2대 금와(BC 47-BC 6) -> 3대 대소(BC6-AD22)
시조 해부루(解夫婁)  

첫해(乙未 기원전 86년)에 왕이 북부여(北夫餘)의 통제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또한 분릉이라고도 한다. 오곡을 기르기가 알맞고 또 범,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가 편리하였다. 
 
3년(기원전 83년)에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명을 내려, 진대(賑貸) 제도를 만들고 원근의 유민들을 불러 위로하고 그들이 제 때에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도록 하였다. 
 
8년(기원전 78년) 이보다 앞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나가 놀다가 부여(夫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의 꾀임을 받아 강제로 끌려가 압록의 가에 있는 방에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고모수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그 부모는 그가 중매도 없이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쫓아내어 변실(邊室)에 살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래 이름이 불리지(弗離支) 였는데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이해 5월 5일에 유화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를 고주몽(高朱蒙)이라 하였다. 

그는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추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다. 
 
10년(기원전 76년)에 왕이 늙고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어 뒤를 이를 아들이 있기를 구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관연에 이르러 큰돌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렸더니 조그만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로다" 

하고 거두어다가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28년(기원전 58년)에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에 새나라를 열었다. 이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39년(기원전 47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고주몽이 정신병(조울증 추정; 백제본기 온조 즉위기 염세 기록에 의함) 증상이 있어서인지 졸본부여의 구신(舊臣)들에 의해 퇴위되었다. 구신들에 의하여 고주몽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그의 아들인 여달왕(閭達王)이 고구려 2대왕, 졸본부여로 치면 고두막한 이후의 4대왕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고주몽은 졸본부여의 3대왕이다. 당시 여달의 나이는 19세나 20세밖에 되지 않으므로 자력으로 고주몽을 밀어낸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구신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것이다. 

강제로 퇴위된 고주몽(高朱蒙)은 도망쳤든지, 은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은거지는 다름아닌 비류수(길림성 사평시 쌍료현 동명(東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이다. 

고주몽의 다른 아들들인 비류, 온조 등도 이미 소서노(召西努)를 앞세워 백제로 떠나간 것이다. 고주몽의 구려국(句麗國) 재건국 시기가 [삼국사기]에 소개된 기원전 37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졸본부여의 단군으로 즉위한 것이 기원전 58년이므로 21년을 재위하였다가 물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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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금와(金蛙) 

첫해(甲戌 기원전 47년)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24년(기원전 23년)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떴다. 고구려가 호위하는 군사 수만명을 시켜 졸본으로 돌아가 황태후의 예로 산릉(山陵)에 장사지내고 옆에 사당을 세웠다. 
 
41년(기원전 6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대소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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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대소(帶素) 
 
첫해(乙卯 기원전 6년)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아들을 볼모로 하여 수교할 것을 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이를 노여워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으므로 그대로 물러났다. 
 
19년(서기 13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렀다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28년(서기 22년) 2월에 고구려가 온 나라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이 스스로 무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진창을 만나 왕이 탄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상장 괴유(怪由)가 앞으로 다가와 이를 죽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는 오히려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이레동안이나 짙은 안개가 끼어 고구려의 열제는 밤에 군사를 몰아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로 도망갔다. 
 
여름 4월에 왕의 아우가 자기를 따르는 자 수백명과 함께 달려가 압록곡 (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이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해 달아나 갈사수(曷思水)가를 확보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갈사(曷思)이다. 
 
【갈사 曷思 고구려 막힐부의 힐주였던 길이가랑(吉爾가浪)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갈사국은 고구려 태조왕에게 항복하고 다시 두만강가 훈춘(琿春)으로 옮겨갔다. 해두왕(海頭王)은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되며 해모수가 수도로 삼았던 웅심산이 있는 강평현 북쪽 해주(海州)의 왕으로 추정된다】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년(서기 68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 (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온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 3세로써 47년을 지나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도두(都頭)를 명하여 우태(于台)를 삼아 집을 내려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삼고 그를 봉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를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 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하여 낙(絡)씨로 성을 내렸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서기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동부여 대소왕 (帶素王)을 죽이자 동부여의 후예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갈사국을 건설하고 하나는 낙씨부여이다. 낙씨부여는 본래가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로 가지 않고 강평현 부근에 남아 있던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된다】 
 
뒤에 차음 자립하게 되자 개원(開原) 서북 쪽으로부터 이사하여 백낭곡(白狼谷 연국(燕國)의 동쪽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부신시(阜新市) 지역)에 이르니 연(燕)과 가까운 땅이다. 
 
문자열제(文咨烈帝)의 명치(明治) 갑술(甲戌 494년)에 이르러 그나라를 가지고 고구려 연나부(椽那部) 굽히고 들어가니 낙씨들이 드디어 제사 지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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