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배기유머 > 고사성어 > 조선 > 26대 고종(1863-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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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점차 조선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몰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 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만다. 

조선의 마지막 국왕으로서 34년(1863-1897),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10년 (1897 - 1907), 통산 44년간 군주의 자리에 있었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하여 7명의 아내에게서 6남 1녀를 얻었는데, 명성황후 민씨가 왕자 척(순종)을 낳았으며, 귀비 엄씨가 영친왕을, 귀인 이씨가 완화군을 비롯 2남을, 귀인 장씨가 의친왕을, 귀인 정씨가 1남, 귀인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 같은 권력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자는 시백, 호는 석파)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명성황후
  
【병인양요 丙寅洋擾, 고종3년(1866)】 

1866년(고종 3년)에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들을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죽임을 당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우리 나라의 문호를 열고자 로스(Ross)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일부는 서울로 쳐들어왔으나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한 달 만에 물러갔다. 
  
그 결과 프랑스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고, 이에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더욱 쇄국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 고종5년(1868)】  

독일의 상인, 항해가 Oppert, Ernst Jacob(1832∼?). 
  
1866년에 영국의 모리슨과 함께 로나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해미 (海美)의 조금진(調琴津)에 들어와 입국 교섭을 벌였으나 거절당하고, 그 해 6월에 다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또다시 거절당했다. 
  
그 후 1868년 4월에 아산만에 상륙하여 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흥선 대원군의 양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카톨릭교 탄압도 더욱 심해졌다. 
  
그가 지은 '금단의 나라, 조선의 여행'은 우리 나라를 외국에 소개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고종8년(1871)】 

1871년(고종 8년)에 미국 군함이 우리 나라 강화도 일대에 쳐들어온 사건. 
  
1866년(고종 3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하자고 대동강으로 와 소란을 피우자 평양 군민이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우리 나라를 책망하고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베이징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 아시아 함대를 출동, 강화도 일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미국의 군함은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공격하였다. 그 때 조선은 무장 어재연(魚在淵) 등이 나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양쪽 군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미군은 물러갔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은 의기 양양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폈다. 
 

 
【운요호 사건, 고종12년(1875)】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도 물길을 따라 초지진 포대에까지 거슬러올라왔다. 
  
이에 강화도 수비군이 포를 쏘아 위협하자, 그들도 맞서 포를 쏘면서 초지진을 부수고 영종진까지 부순 다음, 군사와 주민들을 죽이고 무기와 그 밖의 물자를 빼앗아 돌아갔다. 
  
일본은 이듬해 이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을 앞세우고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 고종13년(1876)】 

1876년(고종 13년)에 우리 나라가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江華島條約). 
병자 수호 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1875년에 강화도에 침입한 일본의 군함 운요호에 대한 우리 포대의 발포 사건을 구실로 일본의 강요에 의해 맺어졌다. 우리 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을 맺음으로써 우리 나라는 쇄국 정책을 버리고, 일본에게 부산, 인천, 원산의 세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침략의 손을 뻗치기 시작 했고, 유럽 여러 나라들도 적극적으로 우리 나라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신사 파견, 고종13년(1876)】 

조선 말기에 일본에 보내던 외교 사절. 본래 통신사라고 하던 것을 강화도 조약 이후 양국이 대등한 처지에서 국교를 행한다는 뜻에서 수신사(修信使)로 고쳐 불렀다.

 
【신사유람단 파견, 고종18년(1881)】 

1881년(고종 18년)에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 제도를 보고 오게 한 시찰단 (紳士遊覽團).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와 김홍집 등이 일본의 근대 문물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부에서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으로 신사 유람단을 조직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근대 시설과 여러 가지 제도 및 산업 시설까지 두루 살피고 돌아와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나라 개화 정책의 추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선사 파견, 고종18년 (1881)】 

조선 말기에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청나라에 파견된 사절(領選使). 
  
고종 18년(1881년)에 청나라의 신식 무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청소년들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톈진의 각 병기 공장에 흩어져 신식 무기의 제조 및 손질법을 배우다 국내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돌아왔는데, 이들이 돌아온 뒤 우리 나라에 최초로 기계창이 세워졌다. 

【만인소 사건, 고종18년(1881)】 

많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정부의 시책을 비판한 사건 (萬人疏事件). 
  
당시 김홍집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그것을 토대로 국정을 개혁하려 하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이 김홍집의 탄핵을 상소한 것이다. 
  
만인소란 1만 명이 연명하여 올리는 상소, 즉 수많은 선비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임금에게 상소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1823년(순조 23년)에 선비 9,996명이 서얼도 관리에 임용할 것을 주장한 상소와, 1855년(철종 6년)에 선비 1만 432명이 장헌 세자의 추존을 주장한 경우가 있다.  

 
  
【임오군란 壬午軍亂, 고종19년(1882)】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우리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우정국 사건, 고종21년(1884)】 

조선 말기의 체신 관청(郵政局). 
  
1884년(고종 21년)에 여러 항구 사이에 오가는 서신과 국내의 우편 사무를 맡아 보기 위해 설치하였는데,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폐지되었다. 
  
1895년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구제도인 역참에 의한 통신 방법이 계속되었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고종21년(1884)】 

1884년(고종 21년)에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적인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배경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띠게 되고, 청나라는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들 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경과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결과 이 정변은 오히려 조선 국내에 청나라의 세력만 강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 간에는 정변의 뒤처리를 위한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 간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었다. 
  
의의 그 목적은 근대적이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위로 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과 외국 세력에 기대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한 점이 전근대적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자발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점에 그 뜻이 있다.

 
【거문도 사건, 고종22년(1885)】 

1885년 4월부터 약 2년간 영국의 동양 함대가 전라 남도 거문도(巨文島)를 불법 점령한 사건. 
  
1860년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기미가 보이자 러시아와 맞서 있던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고 영국기를 게양했다. 
  
청국의 이홍장이 청국 주재 러시아 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함으로써, 1887년 2월 영국 함대는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방곡령 사건, 고종26년(1889)】 

1889년(고종 26년)에 내려진 곡식 수출 금지령, 방곡령(防穀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후 경제적 침투에 주력한 일본은, 온갖 방법을 다하여 우리 나라의 곡물을 사 갔으므로 흉년이 들면 식량 부족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 
  
이에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1889년에 원산을 통한 곡물의 해외 유출을 금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황해도에서도 방곡령이 선포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이 조처가 강화도 조약에 위배된다 하여 해제를 요구하는 한편, 일본 상인의 손해를 보상하라고 위협하였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배상금을 물고 방곡령을 해제하였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 국민의 배일 감정이 더욱 높아졌고, 계속되는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동학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조 신원운동 敎祖伸寃運動, 고종29년(1892)】 

조선 말기에 동학 교도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죄명을 벗겨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한 운동. 
  
2세 교조 최시형의 노력으로 세력이 커진 동학 교도들이 1892년(고종 29년)에 삼례에 모여 정부에 진정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이어 1893년에는 진정서를 정부에 보내고 박광세 등 40명이 서울에 올라가 신원 운동을 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때부터 동학 교도들의 주장에 외국인 배척의 내용이 들어가게 되고, 같은 해 4월의 보은 집회 때에는 탐관 오리의 숙청과 외국 세력의 배척을 주장함으로써 정치 운동화하였다.

 
【동학운동 東學運動, 고종31년(1894)】 

1894년에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 운동. 
갑오 농민 전쟁 또는 동학 혁명이라고도 한다. 우리 역사상 외국의 세력에 대한 항쟁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면서 편 가장 큰 민중 운동이다. 
  
동학 운동의 핵심은 악정(惡政)에 대한 항거, 내정 개혁 요구, 외국 세력의 배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배경 동학 운동의 역사적 배경은 1862년에 벌어진 진주민란을 시초로 하여 삼남 지방의 농민들이 벌인 삼정 문란에 대한 반항에서 이미 싹터 있었다. 
  
동학은 원래 외국 세력의 배척과 사회 개혁을 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농촌 사회에 그 교세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계기 동학이 외세 배척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며 그 교세가 날로 커져 가자, 조정에서는 교조인 최제우를 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이에 교도들은 교조의 죽음이 억울하다 하여 그 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펴게 되었다. 여러 고장에서 큰 모임을 열어 교조 신원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부정과 나쁜 짓을 일삼자, 농민들이 그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1894년). 
  
이에 조정에서는 관리의 잘못을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동학 교도와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라도 전 지역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에 맞서게 된 것이다. 
  
경과 농민들과 합세한 동학군은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청·일 양국의 군대까지 출병하게 되고, 동학군은 그들을 물러가게 하기 위하여 동학군 쪽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정부와 화해를 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일본군의 침략 행동이 강화되기만 하자, 동학군은 다시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결과 공주 우금치의 싸움에서 동학군이 패전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영향 동학 운동은 비록 불리한 국제 정세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내적으로는 갑오개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본의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기세가 더욱 거세게 되었다. 
  
의의 동학 운동의 의의는 부패한 지배 계급에게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섬 으로써 민중의 자각을 크게 높인 데 있다. 그리고 외국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굳건히 심어 놓은 데 있다. 

 
  
【청·일 전쟁 淸日戰爭, 고종31년(1894)】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쳐 청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 대하여 종주권(지배권)을 주장해 오던 청나라와, 메이지 유신 이후 우리 나라에 대하여 끊임없이 세력을 뻗쳐 오던 일본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서로 관여하여 알력을 빚어 왔다. 
  
그러던 중 동학 운동이 일어나 우리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청나라 군대가 파병되자, 이에 맞서 일본은 그들의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보내 옴으로써 양국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1894년 7월 25일에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군도 등을 일본에 떼어 주게 되었으며,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 으로 나타내게 되었고, 대륙 침략의 기초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을미사변 乙未事變, 고종32년(1895)】 

1895년(고종 32년)에 일제가 명성 황후를 살해하고 일본 세력의 강화를 꾀했던 정변. 
  
삼국 간섭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크게 줄어든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회하려 했으나, 명성 황후 등 민씨 세력이 친러 정책을 고집하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 등 친러 세력을 죽인 다음, 친일파 인물들로 내각을 꾸며 갑오개혁 후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단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잔인 무도한 일본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러한 배일 감정을 틈타 친러 세력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俄館播遷, 고종33년(1896)】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을 지낸 사건. 
  
일본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명성 황후가 친러적인 태도를 취하자, 1895년에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 황제는 일본의 만행을 피해 1896년에 러시아 공사관 으로 옮겨 가 1년을 머무르면서 그 곳에서 모든 정치를 행하였다.  
  
그 동안 우리 나라의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에 넘어갔다.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 고종35년(1898)】 

1898년 3월에 독립 협회 주최로 열린 민중 대회. 
  
이승만, 홍정하 등이 주동이 되어 러시아 사람인 탁지부 고문과 군부 교련 사관의 해고를 요구하면서 민중의 여론을 불러일으킨 대회이다. 
  
그 뒤로도 계속 대회를 열어 그 해 10월에는 윤치호를 회장으로 선출하여 정부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고 시국에 대한 6개조의 건의문을 제출하였다. 
  
정부도 처음에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여 그 실시를 약속하였으나 일부 보수적인 관료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탄압을 받다가 끝내 해산당하였으나 얼마 동안 만민 공동회라는 이름으로 활약을 계속하였다.

 
【용암포사건 籠岩浦事件, 고종40년(1903)】 

1903년(광무 7년) 러시아가 한·만 국경의 요지인 용암포를 불법으로 점령한 뒤 조차를 강요한 사건. 
  
압록강 상류에서의 삼림 벌채권을 획득한 러시아가 자국인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군대를 보내어 용암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로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는 저지되었으나, 러·일 간의 대립이 더욱 심해져 이 사건은 러·일 전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국채 보상 운동 國債報償運動, 고종44년(1907)】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운동. 
  
1907년에 서상돈, 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금주와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회를 조직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언론 기관의 협조로 일반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펴 나갔으나, 일진회의 방해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 정신을 발휘한 구국 운동이었다.

 
【헤이그 특사사건 Hague特使事件, 고종44년(1907)】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비밀리에 보내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무력적 침략의 부당성을 주장하려던 사건. 헤이그 밀사사건이라고도 한다. 
  
1905년에 일제는 강제로 우리 나라와 을사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럴 즈음인 1907년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에 고종 황제는 이상설과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가서 만국 회의에 나가 우리의 실상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은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 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친서를 전하고, 그 곳에서 러시아 공사관 서기였던 이위종과 함께 6월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과 일본의 협박으로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의 파기를 회의 의제로 삼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그 곳에서 자결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 신협약의 강요, 구한국 군대의 해산이 잇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