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인상경(文人相輕/文人相轻) ◑ wén rén xiāng qīng

▶ 文 무늬 문 人 사람 인 相 서로 상 輕 가벼울 경

▶ 문인들이 서로를 경멸(輕蔑)하다 라는 뜻으로 지식인들의 오만(傲慢)함 을 비유한 말. 文人往往彼此看不起。轻:轻视。Two of a trade never agree.

▶ ≪전론(典論)≫은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 187-226)의 저서로 중국 최초의 문학 평론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원본은 이미 없어졌다. 다만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소통(蕭通)이 편찬한 ≪문선(文選)≫에 수록된 <논문(論文)> 한 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논문(論文)의 첫 부분은 문인(文人)들 특유의 속성에 대한 비평으로 시작한다.

“문인(文人)들이 서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그리해 온 것이다(文人相輕, 自古而然). 부의(傅毅)가 반고(班固)에게는 백중한 사이였을 뿐인데, 반고는 그를 경시하였다(傅毅之于班固, 伯仲之間耳). 반고는 동생 반초(班超)에게 보냈다는 <여제초서(與弟超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중(武仲)은 글을 잘 지어 난대령사(蘭臺令史)가 되었는데도, 한번 붓을 잡으면 이것저것 쓰느라 스스로 붓을 내려놓지 못했다. [문장을 쓴다는 이름이 있어 난대령사(蘭臺令史)에 임명된 부의가, 바빠서 쉴 틈도 없다고 하니] 가엾은 일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야말로 훌륭하다고 자부하지만 그 사람의 인격과 쓰는 문장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진짜라고 할 수 없다. 부의의 경우를 보면, 쓰는 것은 그저 그렇지만 중요한 인격 쪽은 아직 멀었으니 정말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무릇 사람이란 자신의 좋은 점을 드러내는 데에는 뛰어나지만, 문장이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종류를 두루 잘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사람의 단점을 경시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자기 집안에 있는 몽당 빗자루는 천금처럼 여긴다(家有폐추, 享之千金)’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보지 못한 데서 생긴 폐해이다.’ .... ”

* 폐추(敞-口+小=해질 폐, 掃-손수변=비 추) 모지랑비. 몽당빗자루. '자기 분수도 모르고 자랑함'을 이름.

이를 보더라도 문인상경(文人相輕)의 풍조는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고(班固)는 후한의 역사가로서 그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아 《한서(漢書)》를 지은 사람이고, 부의(傅毅)는 반고와 같은 무렵의 학자로 문장이 좋아 황제의 명으로 여러 서적을 비교·검토·정정하는 일을 맡아 하였다. 문장가가 자기 문장을 내세우고 다른 동료의 문장을 깍아내리는 것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문선》보다 후에 나온 《문심조룡(文心雕龍)》에도 이 일화를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반고와 부의는 문장이 서로 백중함에도 반고는 부의를 깔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문선》에서 문인상경이라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 부의(傅毅)는 자가 무중(武仲)으로, 한나라 장제(章帝) 때 반고와 함께 난대영사(蘭臺令史)를 지냈다. 난대영사는 한대(漢代)에 궁중의 장서를 보관하던 난대를 관장하는 관직명이며, 도서 교감(校勘)을 주관하였다.

* 반고(班固, 32 ~ 92) - 중국 후한 초기의 역사가. 자(字) 맹견(孟堅).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출생. 표(彪)의 아들. 서역도호(西域都護) 초(超)의 형. 소(昭)의 오빠.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이어 고향에서 《한서(漢書)》 편집에 종사하였으나, 62년경 국사를 개작(改作)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다. 초의 노력으로 명제(明帝)의 용서를 받아, 20여 년 걸려서 《한서》를 완성하였다. 79년 여러 학자들이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토론할 때, 황제의 명을 받아 《백호통의(白虎通義)》를 편집하였다. 화제(和帝) 때 두헌(竇憲)의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흉노 원정에 수행하고, 92년 두헌의 반란사건에 연좌되어 옥사하였다. 문학 작품에 《양도부(兩都賦)》 등이 있다.

* 반초(班超, 33 ~ 102) - 중국 후한 초기의 무장. 자(字) 중승(仲升).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출생. 학자 반표(班彪)의 아들로 학문에 뜻을 두고 낙양(洛陽)으로 갔으나, 사서(寫書)를 하면서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빈곤한 생활을 단념하고 무인(武人)으로서 입신양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73년 두고(竇固)를 따라 흉노(匈奴)토벌의 별장(別將)으로 재능을 발휘해 큰 공을 세우고, 이후 31년간 서역(西域)에 머물며, 선선(躇善) ·우전(于蚊:호던) ·구자(龜玆) ·언기(焉耆:카라샬) 등지의 오아시스 제국가를 정복하고 부하 감영(甘英)을 페르시아만(灣) 방면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다.

그 동안 벼슬은 군사마(軍司馬)에서 장병장사(將兵長史)를 거쳐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封)하여졌다. 서역을 토벌하고 반세기 이상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나라를 한(漢)나라의 위령(威令) 밑에 복종시켰다. 102년 71세의 고령을 이유로 귀국할 것을 간청하여 낙양에 이르렀으나, 다음달에 병사하였다.

▶ 北宋时期,张耒做一首诗送给苏东坡过目,苏东坡笑他:“天边赵盾益可畏,水府右军方熟眠。这是热汤清炖王羲之。”张耒心中不服,也指出苏东坡的诗中人名用得不当,苏则要他去找曹操理论。这正是曹丕《典论》:“文人相轻,自古而然。”

[출전] 문선(文選)에 수록된 위(魏) 조비(曹丕)의 전론(典論) 삼국시대 三国 魏 曹丕《典论 论文》:“文人相轻,自古而然,傅毅之子班固,伯仲之间耳,而固小之。”

[동의어] 성기릉인(盛气凌人), 백중지세(伯仲之勢), 난형난제(難兄難弟), 계맹(季孟)

[반의어] 천양지차(天壤之差), 운니지차(云泥之差), 판약천연(判若天渊), 구천구지(九天九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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