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벽청야(堅壁清野/坚壁清野) ◑ jiān bì qīng yě 

  

▶ 坚 굳을 견 壁 벽 벽 清 맑을 청 野 들 야 


▶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들인다는 뜻으로, 적의 양식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의 하나. 진지를 굳게 지키고, 주위의 인구(人口)나 물자를 소개(疏開)하고 부근의 건물·수목 등을 적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제거 또는 소각하다. 坚壁:加固营垒;清野:将四野的财物清理收藏起来。加固营垒;清理收藏财物。 strengthen the defences and clear the fields


▶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해온 방어전술의 하나이다.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어 있는 모든 곡식을 모조리 성내로 걷어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이러한 전법은 우세한 적에 대한 수단으로 흔히 약자가 사용한다.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의 공격을 영원성(寧遠城)을 사수(死守)함으로써 패퇴시켰던 원숭환(袁崇煥)의 견벽청야 작전은 유명하다.

삼국지(三國志)>의 '순욱전(筍彧傳)'에, 위(魏)의 조조(曹操)가 영주의 복양에 진을 치고 있는 여포(呂布)를 강하게 공격하였으나 여포는 무리한 싸움을 피하고 지구전(持久戰)으로 맞섰다. 이때 서주목사(徐州牧使) 도겸(陶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서주를 빼앗기 위해 군사를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명참모 순욱이 이 작전을 말렸다. 

"도경이 죽으면서 서주의 인심이 동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깔보는 것은 금물입니다.지금은 보리를 걷어들일 때이므로 서주에서는 주민을 총동원해 보리를 성내로 걷어들이고 성벽을 다져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벽청야'이므로 우리의 공격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때 여포가 이틈을 노려 공격해 온다면 그때는 끝장입니다."

'견벽청야' 전술을 모를 리 없는 순욱이 조조에게 진언하고, 조조는 서주 탈환 작전을 취소하고 여포공략에 힘을 쏟아 결국에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출전] 삼국지(三國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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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자성어는 조조(曹操)의 명참모 순욱(荀彧)이 조조의 작전을 말린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삼국(三國)시기 조조의 참모였던 순욱은 다른 책사들보다 능력이 뛰어나 조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순욱은 어린 시절 남달리 총명했고 배움을 좋아했으며 늘 경서(經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게 전쟁이 계속되던 동한 말년, 무장이었던 동탁(童卓)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분열위기에 처하자 순욱은 조정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도착한 순욱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천하가 전쟁으로 어지럽습니다. 영천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곳이니 큰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이곳은 영락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됩니다. 오랫동안 머물지 마십시오." 


그러나 대대로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못했다. 순욱이 수차례 경고를 했지만 사람들은 영천땅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과연 얼마후 동탁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으로 쳐들어왔다. 영천에 들어서자마자 집을 불사르고 약탈하였으며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고향을 떠난 순욱은 조조를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일찍 순욱의 총명함을 전해 들었던 조조는 몹시 기뻐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조조는 순욱을 사마로 임명했는데 이때 순욱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조조의 깊은 관심과 신임을 받은 순욱은 밤을 새워가며 절묘한 전략들을 내놓아 조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조 역시 순욱을 두텁게 신임하여 큰일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순욱의 의견을 물었으며 흔쾌히 따랐다. 


한번은 조조(曹操)가 무장(武將) 여포(呂布)를 강하게 공격하였으나 무리한 싸움을 피하고자 여포가 지구전(持久戰)으로 맞섰다. 마침 서주땅를 탐내던 조조는 틈을 타 군사를 돌려 서주를 장악하고 싶었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조조는 순욱을 불러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순욱이 말했다. 


"과거 전한(前漢) 고조 유방(劉邦)이 천하를 장악할 때 가장 먼저 관중을 손에 쥐었습니다. 후한의 광무제 유수(劉秀)가 천하를 제패할 때에도 하내를 먼저 점했습니다. 그들이 곤란과 패배를 경험했어도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근본을 깊고 공고히 해야 천하를 제패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적을 이기고 물러나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순욱은 조조의 표정을 살피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주공께서 현재 점령하고 있는 곳은 천하의 요충지입니다. 이곳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이곳의 안정부터 위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서주땅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지금 그곳에서는 곡식 수확을 끝냈습니다. 게다가 성벽을 견고히 하고 주공이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서 서주땅을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고 약탈하려 해도 수확이 없을 것입니다. 10일도 못되어 우리의 10만 대군이 곤경에 빠질것입니다. 하오니 서주땅 공격을 잠시 미루는 것이 좋을듯 싶습니다." 


조조는 순욱의 권고를 듣고서야 서주를 먼저 공격하려던 생각을 그만두었다. 조조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곡식을 충분히 수확하도록 하고 난 뒤에 다시 여포와 싸웠으며 여포는 패배하고 도망갔다. 


견벽청야란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거둬들인다는 뜻으로 적의 양식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의 하나를 말한다. 

  

东汉末年,曹操在镇压黄巾军占领了兖(yǎn)州地区后,雄心勃勃地准备夺取徐州要地。

   那时,颍川颍阳(今河南许昌)有个名叫荀傕的人,非常有才能,为避董卓之乱迁居冀州,被袁绍待为上宾。他看出袁绍不能成就大事,就投奔到曹操门下。曹操大喜,任命他为司马。从此,他跟随曹操南征北战,出谋划策,深得曹操的信任。

   公元194年,徐州牧陶谦病死,死前将徐州让给了刘备。消息传来,曹操夺取徐州的心再也按捺不住了,忙着要出兵徐州。荀傕知道了曹操的想法,说道:“当年汉高祖保住关中,光武帝刘秀据有河内,他们都有一个巩固的根据地,进足以胜敌,退足以坚守,所以成了大业。如今将军不顾兖州而去攻打徐州,我方留守兖州的军队留多了,则不足以取得徐州;留少了,倘若吕布此时乘虚而入,又不足以守住兖州。最后,一定是弄得兖州尽失,徐州未取。”他还指出,“眼下正值麦收季节,听说徐州方面已组织人力,抢割城外的麦子运进城去。这说明他们已有了准备,一旦有风声传来,他们必然会加固防御工事,转移全部的物资,一切准备就绪迎击我们(原文为:‘今东方皆以收麦,必坚壁清野以待将军’)。这样,你的兵马真的去了,城攻不下,什么东西也得不到手,不出十天,你的军队就会不战自溃。”

   曹操听了荀傕的话,十分佩服,从此集中兵力,很快打败了吕布。后来,又打败了刘备,占据了徐州。

[출전] 삼국지(三國誌)에서 晋 陈寿《三国志 魏志 荀彧传》:“今东方皆已收麦,必坚壁清野以待敌军,将军攻之不拔,路之无获,不出十日,则十万之众未战而自固耳。”

[동의어] 공실청야(空室清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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