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우(關羽) 운장(雲長) 162~219 하동(河東) 해량(解良)현 사람

▶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윈청현[運城縣]인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 출생하였다. 자 운장(雲長).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과 함께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량(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때에는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益州:四川省) 공략 때는 형주(荊州:湖北省)에 머물러, 촉나라의 동방방위를 맡는 등 그 무력과 위풍(威風)은 조조와 손권(孫權)마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격(挾擊)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 출신지 : 하동군 해현, 직위 : 별부사마 - 편장군 - 전장군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지금의 산서성 하동군 해현 사람. 자는 운장(雲長).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군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팽생토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을 받았으나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적벽대전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 공략때에는 형주에 머물러, 그 무력과 위풍은 조조와 손권을 두렵게 하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력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를 세워 그를 무신 또는 재신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  하동(河東) 해량현(解良縣) 사람으로, 자는 운장(雲長). 유비와 도원에서 결의한 이래 고난을 같이 하였다. 삼국지 연의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미 민간에게 널리 신으로 모셔졌을 때라, 내내 관공(關公)이란 칭호로 등장한다.

작자도 전편을 통하여 충의의 화신으로서 주인공을 삼아 그려냈다. 사수관( 水關) 싸움에서 동탁 수하의 맹장 화웅(華雄)을 단칼에 베어 용명을 떨친 이래, 계속 삼국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지녔다. 한때 곤경에 빠져 조조를 의지했으나, 끝내는 단기로 오관 참장(五關斬將)하고 유비 가족을 모셔 의기(義氣)를 빛냈으며, 뒤에 형주(荊州)를 차지해 앉아 움직이지 못할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자존심이 화근이 되고, 양양(襄陽)을 뺏으려 추병한 사이, 오(吳)의 기습을 받아, 궁지에 빠진 끝에 죽음을 당하니 건안(建安) 24년 10월의 일이요, 향년이 59세였었다. 자주 영검을 보이어 呂蒙(呂蒙)을 죽이고, 아들 관흥(關興)을 시켜 원수를 갚게 하는 등, 어디까지나 신격화시켜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재신(財神)으로 신봉되어 민간의 신앙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