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빛과 싸우다 1 -등대가 있는 바다
송재학(1955- )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푸른빛과 싸우다』 문학과 지성사. 1994)

이 시의 이미지를 하나로 연결하여 설명하기는 힘들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 느낌인 바다>는 분절되지 않고 분별되지 않는다. 시는 마침표마저 지워 버렸다. 시에서 마침표는 사유의 절단면의 표상이다. 해서 푸른빛이 무엇을 의미하고 왜 그 푸른빛과 싸우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저 잠언처럼 이미지들은 모호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바닷가 소나무 숲과 배롱나무 곁을 밤이 되도록 괴로움으로 거니는 한 사람을 만난다. 앞 선 누군가도 그와 같은 괴로움으로 숲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그는 어둠을 비추는 등대라는 표상을 떠 올린다. 그런 그가 등대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푸른빛과 싸우는 것일까? 등대의 불빛이 찾아 헤맨 것은 어둠 속의 푸른빛이 아니었던가?

모든 이념과 신념과 이미지는 부정을 통해서만 재 긍정된다. 빛깔을 드러내는 햇빛조차도 ‘폭풍’을 통해서 색을 분배한다. 푸른빛은 다른 빛깔 뿐 만 아니라 스스로의 푸른빛과도 싸워야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등대가 외부의 불빛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불빛이라면. 그러나 자기 스스로와 싸워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힘겹다.

(매일신문. 노태맹 시인 2015.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