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가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 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내 마음대로 읽기

1연의 첫구절을 ‘춘향이를 집으로 치면’(간주하면, 가정을 통한 춘향의 마음을 드러내고자는 의도가 보입니다.) 이라고 고쳐봅시다. 그러면 춘향이는 우물집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 우물집은 정화수(맑고 간절한 기원이 담긴 물),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나날이 임에 대한 간절한 기원의 마음을 다시 가져올 수 있는 생명의 원천, 이슬 같은 맑음)과 같은 그런 우물집입니다. 시골에서 우물집은 마르지 않고 깨끗한 물을 지닌 공간으로 마을 사람들의 생명줄입니다. 그리고 모두 삶을 가능하게 하는 베풀어주는 사랑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춘향이를 우물집에다 비긴 것은 맑고 순결한 존재, 정갈하고 간절한 기원의 존재, 베풀어주는 사랑의 존재 등의 의미가 함축된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방님이 바람과 같다고 하면, 춘향과 대비가 됩니다. 춘향은 집으로 기다림을 지닌, 정적 존재로 서방님은 바람처럼 떠도는 존재가 되므로 춘향의 기다림의 정서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동시에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이란 말 속에서 임에 대한 믿음과 반드시 돌아올 것임을 믿는 춘향의 마음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이라는 구절에서 바람에 부서지고 무너지지만 그 현실마저도 감내하고 따르는 순종적 사랑의 모습을 그려냄으로 더욱 애잔함을 북돋우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연은 춘향의 마음을 집에다 비겨서 간절하고 정갈한 기다림의 자세로 언젠가 돌아올 님을 기다리며, 따르고자 하는 정갈한, 그러나 기다릴 수밖에 없는(집: 정적 존재↔바람:동적 존재) 춘향의 애잔한 마음까지 그려냅니다.

2연에서는 그런 춘향의 모습이 동적으로 형상화되어 그려집니다. 바람이 어려올 푸른 산 언덕을 바라보는 춘향의 모습(기다림의 간절함에 얼마나 자주 그 산 언덕을 바라보았겠습니까?)과 동시에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라는 구절 속에 그리움에 흐느끼는 춘향의 몸짓이 절로 드러나며,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 바람인 서방님(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수정빛 임자란 구절을 봅시다. 수정은 맑고 단단한 보석입니다. 춘향의 마음이 물빛처럼 그리움으로 일렁이다가 그 그리움에 수정이 되는 듯한, 가장 맑고 깨끗한 정성과 사랑의 마음이 응결되고 결정(結晶)이 되어 애잔하면서도 기다림과 믿음의 의지를 잊지 않는 절대화된 사랑까지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시는 몸으로 읽습니다. 한 구절로 한 시간의 생각을 불러올 수 있으며, 한 마디의 말로써 천하를 느끼게 합니다. 다음 말을 잘 음미하여 봅시다. 상촌 신흠 선생의 글입니다.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말하고 그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다 말하지 않고 그치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 할 것이다.


다음은 디딤돌 (문학교과서, 지학사) 문학교과서의 해설입니다. 참조하여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핵심정리
갈래 : 산문시, 서정시
작가 : 박재삼(朴在森, 1933∼1997)
운율 : 내재율
어조 : 그리움을 노래하는 애틋한 어조
성격 : 애상적, 서정적, 낭만적
제재 : 수정가
주제 : 님에 대한 그리움
출전 : [춘향의 마음](196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산문시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시구의 반복과 변용을 통하여 음악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감정의 발산을 적절히 제어하고 있다. '우물집이었을레', '그런 집이었을레' 등의 의미 유보의 어투는 감정을 절제하는 시적 장치로 기능하며, '보았을까나', '하였을까나'와 같은 영탄의 화법 역시 감정 표현을 조절하는 형식적 특성으로 작용한다.
1연에서는 춘향이의 맑고 순수한 속마음이 '물방울의 신선한', '물냄새 창창한' 등의 시구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2연에서는 춘향이의 이도령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읊고 있는데 이도령이 올까 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언덕을 쳐다보는 춘향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특히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 '물살짓는 어깨'와 같은, 시각적 요소가 두드러지면서 동적인 인상이 강한 표현으로 시상의 흐름을 통일시키고 있다.
이 시는 시어 선택의 세심한 배려와 종결 어미의 반복적인 배치, 유기적으로 결합된 이미지 등으로 몽룡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스스로 절제하려고 하는 춘향이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의 춘향은 단지 시인이 재창조한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느끼고 있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이 느끼는 공감대가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 알아두기
<한국시에 드러난 '춘향'의 모습>
고전 연애 소설인 [춘향전]의 여주인공은 몇몇 작가들에 의해 시 속에서 개성적이고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했다. 서정주는[춘향 유문(春香遺文)]에서 춘향이가 몽룡이에게 유언을 하는 듯한 상황을 설정하여 몽룡에 대한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춘향이가 순환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여러 자연물에 자신을 빗대면서 죽음까지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서정주의 [추천사]에서는 춘향을 지상 세계의 한계를 초극하려는 여인으로 창조하여 이상 세계를 끝없이 그리워하는 보편자적 존재로 형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