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우일모(九牛一毛) ◑ jiǔ niú yī máo

 

▶ 九 아홉 구, 牛 소 우, 一 한 일, 毛 털 모 


▶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쇠)털이라는 뜻으로, 많은 가운데서 가장 적은 것의 비유.


아홉 마리 소에 털 한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

①아주 큰 물건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물건

②여러 마리의 소의 털 중에서 한 가닥의 털 ③대단히 많은 것 중의 아주 적은 것의 비유


九:表示多数。许多牛身上的一根毛。比喻极大数量中微不足道的一点。 a very small minority


▶ 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 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 B.C ?-72)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初戰)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 (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B.C. 99년) .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李陵)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厚待)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 : 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던 이광(李廣)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國難)에 임할 용장(勇將)'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史家)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옵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이를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 적고, 이어 착찹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 이 임종시(B.C. 122)에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후에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로 꼽히는 사기(史記) 130여권이 완성(B.C. 97)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출전] 漢書 報任安書 , 文選 司馬遷 報任少卿書


▶ [속담]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 뽑기다.


▶ 아홉마리 소에서 털 한대를 뽑는다는 말로, 극히 많은 수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적은 수를 비겨이른다. 눈곱만하다, 새발의 피라는 뜻이다. 


서한시기 명장으로 불리우는 리광(李广)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리릉(李陵),부친처럼 용감했고 병법에 정통한 유능한 인재였다. 한무제(汉武帝)때 한조의 국토는 쩍하면 흉노족에 의해 침범당했다. 흉노들의 기염을 꺾기 위해 한무제는 흉노를 토벌하는 일에 위청(卫青)대장을 파견했고 리릉에게 5000군마로 흉노를 공격하라 명하였다. 주력군과 연계가 닿지 못한 상황에서 리릉의 부대는 흉노족의 10만대군과 처음 맞붙게 되었다. 리릉은 적군을 향해 돌진해 순식간에 수백명의 적들을 사살했다. 흉노군은 잠간 주춤하며 물러서나 싶더니 다시 단합하여 한나라 군에 반격을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나라 군대는 가지고 온 활을 다 써버리고 칼모양도 심하게 변형된데다 살아남은자가 얼마 안되었다. 흉노족은 3만여명을 소멸하고 리릉도 무척 지쳐있었다. 


리릉의 무예와 묘략에 반한 흉노의 우두머리 좌현왕(左贤王)이 흉노족에 귀복하라고 설득했으나 리릉은 견결히 거절했다. 높은 관직과 봉록, 온갖 수단으로 유혹했으나 리릉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리릉의 군대가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식은 어느덧 경성 장안(京城长安)에까지 전해졌다. 어떤 사람은 리릉이 흉노족에 투항했다고 한무제에게 거짓보고까지 올렸으며 이에 대노한 한무제는 리릉 일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참형에 처하라 명을 내렸다. 


한무제의 처사가 공정하지 않을 뿐더러 합당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 사마천(司马迁)이 자기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한무제에게 청을 올렸다. 


"리릉장군은 비록 이번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3만여명의 적들을 소멸했으니 그 공이 매우 큽니다. 또한 흉노군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았고 우리 군의 주력부대가 제때에 도착하지 못한 점도 감안해 볼때 리릉 장군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예측컨대 리릉 장군은 흉노족에게 투항할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폐하께서 그의 가족들을 참형에 처하신다면 그것은 리릉장군에게 투항하도록 핍박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사마천의 말을 들은 한무제는 그가 죄인의 배신을 공으로 부추긴다 생각되어 더욱 화를 내면서 사마천을 감옥에 처넣어 궁형(宫刑――옛날 형벌 중 하나) 에 처했다. 궁형은 한나라때 참수(斩首) 버금으로 인격을 모욕하는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심신에 심한 손상을 받고 몇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완성하지 못한 일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치욕을 참아가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불행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까 생각하다가 "보임안서(报任安书)"에 비통하고도 감동적인 글을 남겼다. 


"나는 자살하더라도 이 치욕을 씻을 수가 없다. 만약 지금 죽음을 선택한다면 아홉마리의 소 가운데서 털 하나를 잃은 셈이 될 뿐이다. 오늘도 치욕을 참으며 더러운 감방에서 자살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는 원인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내 글을 후세에 전할 수가 없다… … " 


사마천은 한무제 태초원년(기원전 104년) 부터 "사기(史记)"를 쓰기 시작했다. 리릉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이미 6년동안 사기 집필을 위해 힘들게 고생해온 사마천은 결국 치욕을 참아가며 자신의 계획과 이상을 위해 견지하려고 마음 먹었다. 


기원전 96년 6월, 한무제가 전국적으로 대사면을 실시해서야 사마천을 감방에서 풀려났다. 그뒤 사마천은 중사령(中司令)으로 임명되었다. "사기"집필은 한시도 그만두지 않았고, 끝내 역사적인 저작 "사기"를 완성했다. 


"九牛一毛"는 수량이 턱없이 적음을 뜻하는 성구이다.


guwoo.jpg


▶ 汉武帝(刘彻)听说李陵带着部队深入到匈奴的国境,士气旺盛,心里很高与。这时,许多大臣都凑趣地祝贺皇帝英明,善于用人。后来李陵战败投降,武帝非常生气,原来祝贺的大臣也就反过来责骂李陵无用和不忠。这时司马迁站在旁边一声不响,武帝便问他对此事的意见,司马迁爽直地说李陵只有五千步兵,却被匈奴八万骑兵围住,但还是连打了十几天仗,杀伤了一万多敌人,实算是一位了不起的将军了。最后因粮尽箭完,归路又被截断,才停止战斗,李陵不是真投降,而是在伺机报国。他的功劳还是可以补他的失败之罪的。武帝听他为李陵辩护,又讽刺皇上近亲李广利从正面进攻匈奴的庸儒无功,怒将司马迁下在狱里。次年,又误传李陵为匈奴练兵,武帝不把事情弄清楚,就把李陵的母亲和妻子杀了。廷尉杜周为了迎合皇帝,诬陷司马迁有诬陷皇帝之罪,竟把司马迁施予最残酷、最耻辱的“腐刑”。司马迁受到了这种摧残,痛苦之余,就想自杀;但转念一想,像他这样地位低微的人死去,在许多大富大贵的人的眼中,不过像“九毛亡一毛”,不但得不到同情,且更会惹人耻笑。于是决心忍受耻辱,用自己的生命和时间来艰苦地、顽强地完成伟大的“史记”的写作。古人所谓有大勇的人才有大智,司马迁便是这样的人。他知道在他所处的年代里,死一个像他那样没地位、没名望的人,比死条狗还不如,因此他勇敢地活下去,终于完成了那部空前伟大的历史的著作——“史记”。司马迁把他这种思想转娈的情况告诉也的好友任少卿,后来的人便是根据他信中所说的“九牛亡一毛”一句话,引伸成“九牛一毛”这句成语,用来譬喻某种东西或某种人材仅是极多数里面的一部份,好像九条牛身上的一根毛一样。


[출전] 西汉 司马迁《报任少卿书》:“假令仆伏法受诛,若九牛亡一毛,与蝼蚁何以异?”

 

▶ [동의어] 九牛毛(구우모) 

▶ [유사어] 창해일적(滄海一滴),  일사일호(一丝一毫)
                 창해일속(滄海一粟) : 넓고 큰 바다에 작은 좁쌀. 넓고넓은 가운데 하찮은 물건 하나. 
                 대해일적(大海一滴) : 넓고 큰 바다에 물방울 하나.

▶ [반의어] 만갱만곡(滿坑滿谷) 불계기수(不计其数)、거불승거(举不胜举)

  

-----> 九牛一毛 (jiǔ niú yī máo)




※) 20200522_youtube.jpg 사자성어 성어TV성어낭독, 성어퀴즈



한국 Korea Tour in Subkorea.com Road, Islands, Mountains, Tour Place, Beach, Festival, University, Golf Course, Stadium, History Place, Natural Monument, Paintings, Pottery, K-jokes, UNESCO Heritage, 중국 China Tour in Subkorea.com History, Idioms, UNESCO Heritage, Tour Place, Baduk, Golf Course, Stadium, University, J-Cartoons, 일본 Japan Tour in Subkorea.com Tour Place, Baduk, Golf Course, Stadium, University, History, Idioms, UNESCO Heritage, E-jokes, 인도 India Tour in Subkorea.com History, UNESCO Heritage, Tour Place, Golf Course, Stadium, University, Paint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