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편삼절 韋編三絶◑

▶ 韋(가죽 위) 編(엮을 편) 三(석 삼) 絶(끊을 절)

▶ 열심히 독서하는 일, 孔子가 주역을 애독하여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일에서 나온 말로 책을 정독(精讀)함을 일컬음.

① '독서에 열심함'의 뜻. ② 한 책을 되풀이하여 숙독함의 비유.

▶ 현대식으로 말하면, 한 권의 책을 몇십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서 책을 철(綴)한 곳이 닳아 흩어진 것을 다시 고쳐 매어서 애독(愛讀)을 계속하는 것을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책이 소위 몇십 장의 죽간(竹簡)을 끈으로 철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그 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책을 계속하여 읽는 것을 '韋編三絶' 이라고 한다.

'三絶'이란 딱 세 번에 한정된 수가 아니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알려진 전한(前漢)의 사마천 (司馬遷)이 쓴 사기(史記) 가운데 공자전(孔子傳), 즉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실려 있는 말로, 공자가 만년에 역경(易經)을 애독하여 위편삼절(韋編三絶)에 이른 데서 나왔다고 한다.

공자(孔子)가 만년(晩年)에 역경(易經)을 좋아하여, 단(彖) 계(繫) 상(象) 설괘(說卦) 문언(文言)을 서(序)하고, 역경(易經)을 읽어 위편삼절(韋編三絶) 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몇 해를 빌어 이와같이 하면, 나는 易經에 있어서 곧 빛나게 될 것이다.'

孔子晩而喜易 徐彖繫象說卦文言 獨易韋編三絶 曰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

[출전] '史記' 孔子世家  

▶ 韋編은 그 가죽끈을 가리키고 三絶은 세번만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끊어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기’의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나온다. 공자가 만년에 易經(역경)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여러번 끊어지도록 역경을 읽었다(讀易韋編三絶)"

그리고 말하기를 "내게 몇년의 수명이 더해진다면 주역에 대해서 그 가르침을 밝혀낼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공자는 늙어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역경을 열심히 뒤지다보니 책을 묶은 가죽끈이 몇번이나 끊어졌다는 것이다.독서를 권장하는 말에 開卷有益(개권유익)이란 것도 있다.

책은 읽지 않고 펼치기만 해도 유익하다는 뜻이다. 宋(송)나라 황제 太宗(태종)은 책읽기를 좋아한 나머지 학자 李昉(이방)등에게 명하여 방대한 辭書(사서)를 편찬케 했다. 7년만에 완성된 이 사서는 모두 1천여권. 송태종  太平年間(태평연간)에 편찬되었으므로 그 연호를 따서 '太平總類(태평총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매일 두세권씩 1년 동안에 다 읽어보았다고 한다. 황제가 직접 읽었다고 해서 뒷날 사람들은 이 책을 太平御覽(태평어람)이라고도 부른다.政務(정무)에 바쁜 황제가 침식을 잊고 책읽기에 몰두하자 신하들이 좀 쉬어가면서 읽으라고 간했다. 그러자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책은 펼치기만 해도 유익하다네(開券有益).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아"


▶ 종이는 중국 동한(東漢)시기 채륜(蔡倫)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 종이가 있기 전에는 비단이나 대나무로 종이를 대신하였다. 대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 다음 불에 쪼여서 기름을 뺀 것을 간(簡) 또는 죽간(竹簡)이라고 한다. 거기에 금속이나 붓으로 글자를 쓰고 가죽끈으로 엮어 맨 한 뭉치를 책(策) 또는 책(冊)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문장의 단위로 제1편, 제1권, 제1책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사기•공자세가(史記•孔子世家)》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공자는 만년에 '주역(周易)'을 즐겨 읽었으며 주역을 읽는 동안 죽간을 연결하는 위편이 세 번 끊어졌다." 또 공자는 "나에게 수년을 빌려준다면 내가 '주역'에 정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공자가 주역을 얼마나 탐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중국 춘추(春秋) 말기의 위대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이며 유가(儒家)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매우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겼고 박학다식하여 뭇 사람들의 찬사와 공경을 한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그는 열다섯 살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육예(六藝, 예•음악•활쏘기•마차술•서예•수학)에 능통했다.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 등을 비롯한 고전에도 매우 밝았다. 하여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춘추 말기는 주(周)나라의 세력이 쇠퇴하고 제후국 간의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아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정치적 도덕성을 상실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군자의 사명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던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자제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周遊)하기로 한다. 그렇게 시작된 공자의 천하 주유는 장장 14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부르짖는 춘추 제국에서 공자의 '인(仁)'과 '예(禮)'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들은 제나라에 배척당하고 송나라와 위나라에서 쫓겨났으며 진나라에서 채나라로 갈 때에는 7일간 끼니를 잇지 못하기도 했다. 정나라에서는 제자를 잃고 미아가 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자는 뜻을 버리지 않고 낙천적으로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탔다. 고향을 떠난지 14년 만인 기원전 484년, 제자들을 이끌고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교육과 집필에만 전념했다. 


공자가 한 일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후세에 남긴 가장 큰 공적은 제자양성과 고전의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교의 다섯가지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의 편찬은 그의 으뜸가는 공적으로 후대의 학술사상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옛 노래의《시경(詩經)》, 정치기록인《서경(書經)》, 공자의 재해석이 담긴 점술서《주역(周易)》, 춘추 사회생활 양식을 기록한《예기(藝記)》 등이 있다. 공자의 위대한 문화 업적의 탄생에는 '위편삼절' 같은 피나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쓴 《논어》에서는 공자가 학문에 열중하다 보니 끼니를 잊었고 학문을 연구하는 즐거움으로 근심마저 잊었으며 세월이 흘러 몸이 늙어 가는 것도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에서 삼(三)이란 수는 '자주'의 뜻으로 문자 그대로 세 번에 한하지 않고 가죽끈이 끊어질 때까지 '상당한 횟수'로 풀이해야 한다. '위편삼절'하면 수없이 반복해서 책을 탐독하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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