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피삼사(退避三捨/退避三舍) ◑ tuì bì sān shè

▶ 退 물러날 퇴. 避 피할 피. 三 석 삼. 舍 집 사

▶ 삼사(90리)를 물러나다. 남에게 양보하고 다투지 않다. 회피하고 싸우지 않다. 능동적인 후퇴를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격할 기회를 찾고 공격할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물러나 90리를 피하다'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여 물러나는 것을 비유. 后退九十里。比喻为避免冲突;向对方作出回避或让步。舍:古时行军;一舍为三十里。 give one a wide berth


▶ 위나라의 맹장 장합과 촉나라의 노장 황충이 가맹관에서 결전을 벌였다. 장합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호와 하후상 두 장수가 돕기 위해 왔다. 황충은 연달아 세 번씩 패하며 물러났다. 유비까지 그를 걱정해 유봉으로 하여금 돕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합은 이를 수상히 여겼는데 하후상의 호통에 그만 말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하후상과 한호가 방심해 있을 때 황충이 쳐들어오니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출전] 삼국지(三國誌)에서

▶ 기원전 637년, 중이는 초(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중이를 위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며, 그에게 물었다.
"공자가 만약 진나라로 돌아가 군주가 될 수 있다면,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을 하겠오?"

"아름다운 여자나 옥(玉)이나 비단 같은 것은 이미 많이 소유하고 계시고, 좋은 새 깃(羽)이나 상아(象牙), 모피(毛皮) 같은 것도 다 이곳에서 생산되옵니다. 그것들이 저의 나라에 나돈다면, 그건 군주께서 쓰시고 남는 것일텐데, 제가 무엇으로 군주께 보답해야겠습니까?"
"그렇다고는 할지라도 무엇으로 내게 보답을 하시겠오?"

중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만일 군주의 은혜로 진(晉)나라로 돌아가 훗날 진나라와 초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중원(中原) 땅에서 만나 싸우게 된다면, 저는 군주를 피해 90리를 물러나고[晉楚治兵, 遇于中原, 其避君三舍], 그래도 군주께서 싸움을 그만 두자는 명을 내리시지 않으신다면, 그때에는 왼편에는 매와 화살을 들고, 오른편에는 화살자루와 칼집을 차고서는, 군주와 같이 달려나가겠습니다."

훗날, 19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이는 진(秦)나라의 도움으로 진(晉)나라를 장악하게 되자, 사람을 시켜 진(晉) 회공(懷公)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하나인 진(晉) 문공(文公)이 되었다.

기원전 633년, 초나라는 진(陳), 채(蔡), 정(鄭), 허(許)나라의 군대와 연합하여 송(宋)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는 진 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진나라는 즉각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때, 초나라 장군 자옥(子玉)은 교만하여 적을 가볍게 여기고, 초나라 군대를 이끌고 맹렬하게 진나라 군대를 향해 진격하였다.  진 문공은 진나라 군대에 90리를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려, 자신이 과거에 했던 약속을 지켰다. 초 장군 자옥은 진나라 군대가 후퇴한 것은 그들이 자기 군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다시 50리를 전진하여 매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진나라의 최후가 왔다."

기원전 632년, 진(晉)나라 문공은 진(晉), 제(齊), 송(宋), 진(秦) 등 4개국과 연합하여 성복(城복)에서 초(楚)나라와 전투를 하였다. 


교전이 시작되기 전, 초나라 성왕(成王)은 초나라 장군 자옥(子玉)에게 당부하였다. "진나라 문공은 외국에서 오랫동안 유랑하였던 까닭에 온갖 경험을 다 해보았으며, 뿐만 아니라 정치 경험도 있으니, 그를 가볍게 보고 섣불리 상대해서는 아니 되오."


그러나 자옥은 승리를 거두어 자신의 위풍(威風)을 과시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다시 성왕에게 사람을 보내 전투를 시작할 것을 청하였다. 성왕은 몹시 불만스러워 그에게 많은 병마(兵馬)를 주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자옥은 부대를 이끌고 진나라 군대를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 문공은 초나라의 주력 부대를 피하여 비교적 약한 우측 부대를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병력을 집중시켜 초나라 군대를 포위하고 협공하였다. 결과는 진나라의 대승(大勝)이었다.

자옥은 패전하고 나서, 성왕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 문공은 자옥이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음 속의 큰 걱정거리가 한순간에 없어졌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제 나를 해칠 자가 없구나."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 사(舍)는 옛날에 군대가 보통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인 30리를 말한다. 춘추시대의 진나라 헌공(獻公)은 애첩의 이간질에 속아 태자인 아들 신생(申生)을 죽이고, 신생의 동생인 중이(重耳)마저 죽이려 하였다. 중이는 진나라에서 도망쳐 이후 19년 동안이나 타국을 떠돌아다녔다.

 

중이가 초(楚)나라에 갔을 때, 성왕(成王)은 중이가 나중에 반드시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 보고 예를 다하여 맞이하고는 귀빈으로 대접하였다. 하루는 성왕이 주연을 베풀어 중이를 초대하여서는 문득 "공자가 만약 진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에게 어떻게 보답할 생각이오"라고 물었다.

 

중이는 "제가 만일 군주의 은혜로 귀국하여 국정을 맡게 된다면,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우게 되었을 때 90리 뒤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군주께서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신다면 저도 맞서 싸우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성왕의 신하들이 중이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성왕은 듣지 않았다.

 

나중에 중이는 진나라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문공이 다스린 뒤로부터 진나라는 날로 강성해졌다. B.C. 633년에 진나라는 초나라와 싸우게 되었는데, 문공은 약속을 지켜 군대를 90리 뒤로 물러나도록 하였다. 초나라의 장군은 문공의 뜻을 모르고 두려워서 후퇴한 것이라고만 여겨 결전을 벌였다가 대패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左氏傳)》의 '희공(僖公) 23년'조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퇴피삼사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여 물러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유사어] 피지즉길(避之則吉), 피군삼사(避軍三舍)


▶ 진(晉)나라 공자(公子) 중이(重耳)는 19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였는데 덕망이 높고 인품이 훌륭해 가는 곳마다 제후국 군주들의 환대를 받았다. 


중이가 초(楚)나라에 머무를 때였다. 초성왕은 중이에게 예를 갖추어 극진히 대하였고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한번은 연회석상에서 초성왕이 중이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내가 자네를 이토록 아끼는데 장차 군위에 오른다면 과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생각이오?" 


중이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만약 제가 국군이 된다면 진, 초 두 나라가 싸우게 되었을 때 먼저 퇴피삼사(退避三舍)할 것입니다. 90리를 후퇴하는 것으로 은혜를 갚지요." 


같은 자리에 있던 초나라의 장군 자옥(子玉)이 이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영웅의 기개가 넘치는 중이가 향후 진나라에 돌아가면 반드시 초나라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중이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초성왕에게 간하였다. 


그러나 초성왕은 자옥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현재 주변국들에서는 영웅물색에 한창인데 신(臣)은 되려 영웅을 없애려하다니 가당치 않소. 그렇게 되면 주변국들의 신의를 잃고 악명만 높아질뿐 우리에게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19년이 흐른 뒤 중이는 귀국하여 진(晉)나라 문공(文公)으로 즉위하였다. 오랫동안 나라 밖을 떠돌며 모진 고난과 배고픔을 견뎠던 진문공은 온 힘을 다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며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백성들은 부유해졌다. 


당시 패업을 이루기에 여념 없었던 초나라는 기원 633년에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등 나라들과 연합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마침 초나라의 장군 자옥이 초군을 이끌었다. 연합군은 승승장구하며 빠르게 송나라 도읍을 포위하였고 연합군의 드높은 기세에 송나라는 급히 진나라 문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동안 송나라와 깊은 우의를 다져온 진나라는 송나라에 파병하여 조나라와 위나라를 연이어 제패하고 초나라 진격에 맞섰다. 초나라와 맞선 상황이 되자 진문공은 초성왕에게 한 약속이 떠올라 즉각 "퇴피삼사"하라고 명령했다. 


90리나 되는 거리를 후퇴하라니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해진 병사들에게 진문공이 해명하였다 . 


"과인이 과거 초나라에 있을 때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90리를 물러서겠다고 초왕과 약속한 일이 있다. 과인은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나라군은 90리를 물러섰다. 그러나 이는 진문공의 계책에 불과했다. 진문공이 초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해 약점을 찾아 다시 진격하니 초군은 군기가 해이해지고 기세가 꺾이면서 결국 진나라에 대패하자 이에 분하여 초나라 장군 자옥은 자살하고 말았다. 


진문공은 퇴벽삼사의 약속을 지킴과 동시에 패주의 지위도 확립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 전쟁을 "성복대전(城濮大戰)"이라고 부른다. 


▶ 春秋时候,晋献公听信谗言,杀了太子申生,又派人捉拿申生的弟弟重耳。重耳闻讯,逃出了晋国,在外流忘十几年。经过千幸万苦,重耳来到楚国。楚成王认为重耳日后必有大作为,就以国群之礼相迎,待他如上宾。一天,楚王设宴招待重耳,两人饮洒叙话,气氛十分融洽。忽然楚王问重耳:“你若有一天回晋国当上国君,该怎么报答我呢?”重耳略一思索说:“美女待从、珍宝丝绸,大王您有的是,珍禽羽毛,象牙兽皮,更是楚地的盛产,晋国哪有什么珍奇物品献给大王呢?”楚王说:“公子过谦了。话虽然这么说,可总该对我有所表示吧?”重耳笑笑回答道:“要是托您的福。果真能回国当政的话,我愿与贵国友好。假如有一天,晋楚国之间发生战争,我一定命令军队先退避三舍(一舍等于三十里),如果还不能得到您的原谅,我再与您交战。”四年后,重耳真的回到晋国当了国君,就是历史上有名的晋文公。晋国在他的治理下日益强大。公元前633年,楚国和晋国的军队在作战时相遇。晋文公为了实现他许下的诺言,下令军队后退九十里,驻扎在城濮。楚军见晋军后退,以为对方害怕了,马上追击。晋军利用楚军骄傲轻敌的弱点,集中兵力,大破楚军,取得了城濮之战的胜利。故事出自《左传 僖公二十二年》。成语“退避三舍”比喻不与人相争或主动让步。

[출전] 先秦 左丘明《左传 僖公二十三年》:“若以君之灵,得反晋国,晋楚治兵,遇于中原,其辟君三舍。”

[동의어] 위곡구전(委曲求全)

[반의어] 침봉상대(针锋相对), 봉망필로(锋芒毕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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