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이제이(以夷制夷) ◑ yǐ yí zhì yí

▶ 以(써 이) 夷(오랑캐 이) 制(마를 제) 夷(오랑캐 이)

▶ 이 나라의 힘으로 저 나라를 제압함.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뜻으로, 외국을 이용하여 외국을 제어하고 자국의 이익과 안전을 꾀하는 외교정책을 말한다.

▶ 원화3년(기원86년)에 노수호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는 등훈을 장액의 태수로 임명하였다. 기원 88년에 호강교위 장우가 소당종·강미오 등을 유살하여 강족 여러 부락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는데, 그들은 함께 복수할 것을 꾀하였다.


승상 공경은 등훈을 천거하여 장우와 바꾸게 하였다. 이에 강족들은 4만여 명을 모집하여 얼음이 얼면 황하를 건너 등훈을 칠 준비를 하였다. 그 지역에는 또 소월씨호라고 하는 소수 민족이 있었는데, 매우 용맹한 기병 2,3천 기가 있어 매번 강족과의 싸움에서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곤 하였다. 그들은 한조(漢朝)와 별다른 원한이 없었고 한조도 그들을 때때로 이용하곤 했다. 


강미오의 아들 미당은 강족과 함께 1만여 명을 모아 산에서 내려왔지만 감히 등훈을 치지는 못하고 먼저 소월씨호를 쳤다. 등훈은 군대를 파견하여 소월씨호를 보호하여 주었기 때문에 미당은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측근 막료가 주장했다. 


"그들이 서로 싸우면 우리가 강족을 정벌하는 데 유리하므로 소월씨호를 보호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오랑캐로 오랑캐를 치자는 것이었다.(당시 한족 통치자들은 소수 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보았다) 


그러자 등훈이 조용히 말했다.
"옳은 말이네. 그렇지만 소월씨호가 절멸되면 오히려 강족의 힘이 강대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균형을 잡아 주어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일세." 


[출전] 후한서(後漢書)-등훈전.


▶ 등훈(鄧訓)은 동한(東漢)의 개국공신 등우(鄧禹)의 여섯째 아들로 어릴 때부터 큰 포부를 지녔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들을 깊이 연구했으나 문학에는 전혀 뜻이 없어 아버지 등우로부터 늘 꾸중을 듣군 했다. 


한명제때 등훈은 랑중이라는 관직을 지냈다. 


영평년간(기원전 58년)에 조정은 운하를 파서 순타하,백구하 등 강물을 하북에서부터 양장창 즉 오늘의 산서성 분양까지 이어놓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를 하려면 물길이 4백여곳에 달하는 물목을 지나야 했는데 태원의 관원들과 백성들은 물길을 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년이 지났지만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장제 건초 3년(기원 78년)에 등훈이 이 공사의 총관리로 임명받았다. 그가 직접 현지를 돌아보니 이는 전혀 완성할수 없는 공사라 황제에게 그 상황을 소상히 보고했다. 이에 황제는 공사를 중단하게 했고 그 결과 조정은 해마다 지출을 크게 줄일수 있게 되었고 수천명의 백성들이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장화 2년(기원 87년)에 호강교위 장우(張紆)가 챵족의 두령을 죽였는데 이는 여러 챵족인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이들은 연합해서 한나라에 보복하려 했다. 이에 황제가 크게 근심을 하게 되었고 등훈이 여러 대신들의 추천으로 장우을 대신해 호강교위로 부임했다. 


북방의 민족인 소월씨는 그 병력이 기마병 2,3천명뿐이었지만 싸움에 용감했고 챵족과의 싸움에서 늘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하군 했다. 


챵족의 두령인 미당이 만여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국경까지 진격했으나 직접 등훈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월씨에게 함께 등훈을 치자고 압력을 가해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등훈은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절대 출전하지 말라고 장군들에게 명을 내렸다. 


챵족이 소월씨를 먼저 칠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조정에 유리한 것이며 이들끼리 싸운다면 우리는 여기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적을 이용해 적을 친다는 것이었다. 


이에 등훈이 깊이 생각한후 말했다. "장우가 신의를 지키지 않아 챵족의 불만을 초래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우리는 많은 재력과 물력을 소모하게 될것이고 인마도 잃게 될것이다. 챵족인들이 불만을 가진 원인은 우리의 관리가 신용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소월씨가 위험에 처했는데 우리가 강 건너 불보듯 해서야 되겠는가?" 


말을 마친 등훈이 성문을 열어 소월씨의 백성들이 성에 들어와 난을 피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미당은 한나라 군사들이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한것을 보고는 조용히 철군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소월씨의 군민들은 크게 감동했고 기쁜 심정으로 말했다. "등시군은 참으로 인자한 분이시다. 그가 우리의 처자들을 살려주었으니 그의 령이라면 모두 받을것이다." 


등훈이 소월씨의 백성들중 수백명을 뽑아 한나라 군대에 편입하니 서로간에 한집안처럼 지내게 되었고 소월씨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칭송하게 되었다. 


당시 챵족을 비롯한 민족들중에는 나쁜 풍습이 있었는데 병에 걸리면 자결하군 했다.이들은 병으로 죽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등훈은 이들중 병에 걸린 사람은 즉시 격리시키고 이들이 병장기를 만지지 못하도록 했으며 의원을 파견해 병자들이 완치될 때가지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주었다. 이 일이 많은 소수민족들중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지어는 미당의 백부가 노모와 수하 8백명을 데리고 투항을 해왔다. 


후에 등훈이 연이어 싸움에서 이기면서 미당은 괴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등훈이 53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는데 매일 몇천명에 달하는 챵족인들이 조문을 왔다. 


챵족인들의 풍속은 부모가 사망하면 말을 타고 환호성을 내는 것이 장례의식이었고 곡을 하는 것은 망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등훈이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집집마다 등훈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집에 누가 병에 걸리면 이 사당에서 제를 지내 쾌유를 빌었다. 


등훈은 가정교육도 아주 엄격했다. 그의 딸이 한화제의 황후로 되었으나 그는 종래로 궁중의 세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었고 다섯 아들도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 


등훈은 사망후 평수경후로 추서되었다. 


봉권왕조의 관리였던 등훈이 큰 안목을 가지고 소수민족을 차별시하지 않았으니 이는 후세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일이다. 


▶ [出处] 南朝 宋 范晔《后汉书 邓训传》:“议者咸以羌胡相攻,县官之利,以夷伐夷,不宜禁护。”

[예문] 鲁迅《伪自由书 以夷制夷》 :“我还记得,当去年中国有许多人,一味哭诉国联的时候,日本的报纸上往往加以讥笑,说这是中国祖传的以夷制夷的老手段。”

[동의어] 이이치이(以夷治夷), 이이벌이(以夷伐夷)

[반의어] 경전하사(鯨戰蝦死), 간어제초(間於齊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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