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동벌이(黨同伐異/党同伐异) ◑ dǎng tóng fá yì

▶ 黨 무리 당 同 한가지 동 伐 칠 벌 異 다를 이

▶ 옳고 그르고 간에 같은 사람은 편들고, 다른 파의 사람을 배격하는 것을 말함. 같은 파끼리는 한 패가 되고 다른 파는 배척하다. 집단 간의 투쟁을 지칭. 党:原同“傥”;指偏袒;现在也指结伙;伐:攻击偏袒或聚集同自己意见相同的人;排斥、攻击跟自己意见不同的人。泛指社会上成帮结派相互斗争。 side with copartners against those who disagree


▶ 후한(後漢)에서는 제4대 화제(和帝) 이후로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그 일족인 외척이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 외척에 대항하여 이를 타도하는 역할을 주로 한 것이 환관의 세력이었다.

그리하여 후한 말기에는 외척과 번갈아 권력을 장악하고 채우는 썩어빠진 정치 상황이 일반이었다.

외척이나 환관에 의한 정치의 사물화(私物化)에 강한 불만을 품은 것은 지방의 호족이나 양반 출신의 지식인들었다. 그들은 중앙과 지방의 강직한 관료를 중심으로 당파를 결성하여 외척이나 환관의 정권당에 대항했다. 이리하여 서로 세력을 다투는 격심한 삼파전이 전개되었다.

환관당은 이윽고 외척 세력을 궤멸시키고, 지식인당에 대해서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그 결과 정치를 맡아 보아야만 할 지식인 관료층이 완전히 황실을 저버리게 되어 후한 왕조는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로 보아, 가공할 파벌 싸움은 양식 있는 사람들의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식을 제거시켜 집단 전체를 활력을 잃은 상태로 만들었다.

더욱이 한 사람 한 삶은 모두 나무랄 데 없는 군자들인데, 일단 당파를 결성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엄두도 나지 않는 짓거리를 당파의 이름으로 아주 손쉽게 해낸다.

▶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한 이래 중국의 권력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자연히 황제를 둘러싼 친위 집단이 권력을 농단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을 이룬 것이 환관과 외척 세력이었다. 또 한(漢)나라 때에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유학을 공부한 선비 집단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하자 선비들은 초야로 피해 청의(淸議)를 일삼고, 자연스럽게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이 모였다. 이를 당인(黨人)이라 한다.

후한 때에는 화제(和帝) 이후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이 과정에서 황태후의 친인척인 외척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일 장성한 황제는 이들의 전횡을 탐탁치 않게 여겨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우고 이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그 중심인 된 세력이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집단의 결속력이 유달리 강하고,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경륜보다는 자신들의 이해에 민감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권력을 쥐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마련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은 예비 관료 집단인 선비들이 환관의 농단으로 국정이 문란하고 풍속이 타락해 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들도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여 전국적으로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비 집단과 외척, 환관 세력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당동벌이이다.

좁게는 당고(黨錮)의 옥(獄) 이후 이응(李膺)을 중심으로 한 당인들이 유교적 지식 계급 이외의 세력을 적대시하던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한은 외척이 망쳤고, 후한은 환관이 망쳤다고 한다. 후한 말에 이르러 환관들은 외척과 선비 집단을 철저히 탄압하고, 그 결과로 지식인 관료 집단인 선비 집단이 황실을 버림으로써 후한이 자멸하게 되었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당동전(黨同傳)'


▶ 公元前141年,刘彻即位,史称汉武帝。他当政的第二年就下一道诏书,命朝廷大臣和各地诸侯、郡守推贤良文学之士。诏书下达后不久,各地送来了一百多个有才学的读书人。武帝命他们每人写一篇怎样治理国家的文章,其有有个名叫董仲舒的文章写得不错,武帝亲自召见他两次,问了他不少话。董仲舒回话后,又呈上两篇文章,武帝看了都非常满意。


  董仲舒的三篇文章,都是论述天和人关系的,所以合称为《天人三策》,又称《举贤良对策》。其中宣扬的理论,叫做“天人感应”。这种理论把封建统治尤其是皇帝的权力神化:谁反对皇帝,谁就是反对“天”,就是大逆不道。


  为了贯彻这套理论,董仲舒在《天人三策》中提出了三项建议:一是将诸子百家的学说当作邪说,予以禁上,独尊孔子及其儒家经典,以通过文化上的统制,达到政治上的统一。这就是所谓“罢黜百家;独尊儒术”。二是设立传授儒家经典的最高学府。三是网罗天下人才,使他们忠心耿耿地为朝廷服务。


  董仲舒“罢黜百家;独尊儒术”主张,非常合乎武帝一统天下的心思。他亲政后,就设置了专门传授儒家学说的五经博士,向五十名弟子讲述《诗》《书》《易》《春秋》等五部儒家经典。这些弟子每年考试一次,学通一经的就可以做官,成绩好的可当大官。后来博士弟子人数不断增加,最多时达三千人。


  到汉宣帝刘询当政的时候,儒家思想已经成为维护封建统治的下统思想,儒家学说更是盛行,刘询自己也让五经名儒萧望之来教授太子。但由于当时儒生对五经有不同的理解,所以宣帝决定进行一次讨论。


  公元前51年,由萧望之主持,在皇家藏书楼兼讲经处的石渠阁,进行了一次大规模的讨论。在讨论过程中,儒生们把和自己观点一样的人作为同党,互相纠合起来;而对观点不一样的人,则进行攻击。为此,《后汉书》的作者在评述这一现象时,把它称为“党同伐异”,也就是纠合同党攻击异已。


[출전] 南朝 宋 范晔《后汉书 党锢传序》:“自武帝以后,崇尚儒学,至有石渠分争之论,党同伐异之说,守文之徒,盛于时矣。”


[동의어] 붕비위간(朋比为奸), 결사영당(结私营党), 주제이기(诛除异己)


[반의어] 공정무사(公正无私), 부편부의(不偏不倚), 무편무탄(无偏无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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