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점자희(霑霑自喜) ◑

▶ 霑(젖을 점) 霑(젖을 점) 自(스스로 자) 喜(기쁠 희)
  
▶ 득의(得意) 양양(揚揚)하며 스스로 즐거워함 또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겨 우쭐댐을 뜻한다.
  
▶ 서한(西漢) 시대, 위기후(魏其侯) 두영(竇영)은 한나라 효문제(孝文帝)의 황후이자, 경제(景帝) 유계(劉啓)의 어머니인 두태후의 조카로서 아버지 대까지 대대로 관진(觀津)에서 살았다.

두태후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두태후는 큰 아들인 유계를 좋아하지 않고, 작은 아들인 유무(劉武), 즉 양효왕(梁孝王)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두영은 큰 아들인 유계의 정통적인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로 인하여, 두태후는 두영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위의 원인으로 두영은 줄곧 중책을 맡지 못하고, 황후나 황태자의 집안을 관리하는 첨사(詹事)라는 작은 관직에 머물러 있었다. 두영 역시 이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병을 구실로 하여 사임하였다.

효경제 3년이 되던 해, 오왕(吳王)과 초왕(楚王) 등 7명의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급한 때인지라 황제는 두영을 불러 들여 그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금 천 근을 하사하였다. 두영은 은퇴한 두 명의 장군과 여러 현사(賢士)들을 추천하고, 하사 받은 금(金)은 궁전의 복도에 늘어놓고 군인들이 필요한대로 가져가 여러 가지 비용에 쓰게 하였으며, 정작 자신은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다.

반란이 평정되자 두영은 위기후(魏其侯)에 봉하여 졌으며, 그의 명망은 크게 높아졌다. 조정에서도 중요한 일을 논할 때면, 두영의 의견을 존중하였으며, 두영에 대한 두태후의 태도도 점차 바뀌어 갔다. 그러나 황제는 한사코 그를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승상 유사(劉舍)가 무능함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자, 두태후는 황제에게 그 후임으로 위기후 두영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한경제는 이렇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제가 위기후를 애석하게 여겨 승상으로 임명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위기후는 뽐내기만을 좋아할 뿐으로 경솔한 행동이 많아서 승상이 되어 중임을 맡기에는 어렵습니다[魏其者, 霑霑自喜耳, 多易, 難以爲相持重]."
한경제는 끝내 위기후 두영을 등용하지 않았다.
  
[출전] 사기(史記) 권107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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