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류격즙(中流擊楫) ◑

▶ 中(가운데 중), 流(흐를 류), 擊(칠 격), 楫(노 즙) 
 
▶ (굳은 결심을 보이느라고)강 한복판에서 노로 뱃전을 치며 박자를 맞추는 일. '잃어버린 땅을 수복(收復)하고자 하는 결심(決心)'을 비유. 강의 중류에서 노를 두드리다라는 뜻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굳은 결심 또는 가슴에 품은 웅대한 뜻을 비유

▶ 유곤(劉琨)과 이름을 나란히 하던 조적은 일찍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당시 도읍[동진(東晋)의 수도는 건강(建康)으로, 지금의 남경이다]의 부근에서 뜻 있는 젊은이들과 연락을 취하며, 중원(中原)을 수복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진나라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본시 북벌(北伐)의 계획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조적과 같은 젊은이들의 애국적 열정은 높이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조적을 '분위장군(奮威將軍)' 겸 '예주자사(豫州刺史)'에 임명하였으나, 사실은 일 천명의 병력과 삼천 필의 포(布)만을 주었을 뿐이었다. 무기 등은 주지 않았으므로, 조적 자신이 직접 조달하여야만 하였다. 

조적은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휘하의 일백 여 세대만을 데리고 강을 건너 북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배가 강의 안 가운데 이르렀을 때, 조적은 솟아오르는 자신의 격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노를 두드리며 이렇게 맹세하였다. 

"나 조적은 만약 중원의 적들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 

강을 건넌 후, 회음(淮陰)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조적은 철을 가공하여 무기를 만드는 한편, 군사들을 모아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즉각 북쪽을 향해 진군하였다. 

일거에 갈족(갈族)의 왕 석륵(石勒)을 물리치고, 봉피(蓬陂; 지금의 하남성 개봉 부근) 등을 공격하였다.

조적의 군대는 매우 신속하게 황하 이남의 전 영토를 수복하고 석륵을 압박하여 화친(和親)을 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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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기 오(吳)나라가 초(楚)나라 경성을 공격하자 초소왕(楚昭王)은 영토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에 초나라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신포서는 진애공(秦哀公)을 만나 이렇게 아뢰었다. 

"오나라가 무도함으로 천하를 삼키려 하니 초나라가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충신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진공께 간곡히 청을 올립니다. 부디 저의 고충을 헤아려 주시고 초나라를 구원해주십시오." 

그러자 진애공은 "먼저 돌아가게. 짐이 대신들과 의논해볼 것이니..."라고 하며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신포서가 거듭 애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포서는 진나라 조정 대청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이레 동안 통곡하였다. 신포서의 읍소에 감동한 진애공은 "초국에 이런 충신이 있다니... 과인에게는 이런 충신이 없음에 슬프구나!"라고 말하며 즉각 출병을 명령했다. 

진나라 군대는 오나라와의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초나라를 회복하였다. 왕위를 되찾은 초소왕이 신포서에게 상을 내렸지만 신포서는 이를 거절하였다. "내가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것은 명예나 노고를 치하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제 군주의 왕위가 안정되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날 밤, 신포서는 작별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은거생활을 했다. 

중국의 역사에는 신포서와 같은 충신들을 찾아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동진(東晉) 시기의 조적(祖逖) 역시 우국우민지사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위진(魏晉) 시기 이민족 간의 갈등으로 천하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동진 조적은 적들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형제들이 처참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고 국위를 드높이 떨치리라 마음을 다졌다. 조적은 북벌을 실현하고자 무사들을 소집하여 밤낮으로 호된 훈련을 거듭하며 세력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날, 조적이 진나라 원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진(晉)나라 황실의 난은 번왕들이 권세를 다퉜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외적들에게 처참히 짓밟힌 백성들도 격분하여 투지에 불타있습니다. 군주께서 여러 장군에게 위엄으로 명하고 조적에게 군사를 맡겨 출병을 허락하신다면 국군의 호걸들도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며 저 조적은 반드시 적들을 제거하고 국치를 씻을 것을 맹세하옵니다." 

원제는 몹시 기뻐하며 조적을 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하고 천 명이 먹을 양식과 베 3천 필을 주며 스스로 의병을 모으게 했다. 드디어 조적이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함선이 장강 중류에까지 이르자 조적은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중원의 적을 소멸하고 강산을 수복하지 못하면 이 조적은 흐르는 강물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중류격즙(中流擊楫)"하고 맹세했다. 

조적은 수차례 싸움에서 적들을 물리치고 많은 땅을 수복하였다. 조적은 병법을 다스림에 현명하였고 상과 벌을 줌에 있어서 몹시 엄격하였다. 그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거두고 제를 지냈으며 투항한 적들은 용서했다. 이에 군심과 민심이 그에게 모아지니 백성들은 조적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면 돼지를 잡고 술을 올리며 그들의 승리를 경축했다. 당시 강북일대에는 조적의 위덕을 기리는 민요가 전해졌다고 한다. 

                          "다행이로다 남은 백성들은 포로신세를 면하고 
                           삼신(三辰)은 밝아져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났구나 
                           현주(玄酒)는 고달픔을 잊게 하고 포효(瓠脯)는 달콤하니 
                           무엇으로 은혜를 노래하고 춤을 추랴" 

사자성어 "중류격즙(中流擊楫)"은 중국 진(晉)나라 때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조적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강의 중류에서 노를 두드리다라는 뜻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굳은 결심 또는 가슴에 품은 웅대한 뜻을 비유한다. 

[유사어] 도강즙(渡江楫)

[출전] 진서(晉書) 조적전(祖적傳) 



※) 20200522_youtube.jpg 사자성어 성어TV성어낭독, 성어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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