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편단류 投鞭斷流◑
 

▶ 던질 투(投) , 채찍 편(鞭) 끊을 단(斷), 흐를 류(流)


▶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막는다는 뜻으로, 병력에 있어서의 강대함을 비유한 말. 군사들이 손에 쥔 채찍만 던져도 강을 막는다는 말로서 군사가 많거나 군사력이 강대함을 비겨 이른다.

▶ 진(秦)의 부견이 대진천왕이라 칭한 후, 문무대신을 모아 놓고 100만의 병력으로 진(晋)을 치고자 의견을 물었다.

권익은 진(晋)에는 현신이 많다는 이유로, 또 석월은 진(晋)은 양자강의 험난함에 의거하고 있어 불리하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부견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대군(大軍)의 채찍으로도 강의 흐름을 차단시킬 것이다(投鞭斷流)."

라고 말하고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여 낙양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출전] 진서(晋書) 견재기(堅載記)  

▶ 서진(西晉) 말기, 정치가 부패하자 북방의 이민족들은 이 틈을 노려 앞다투어 나라를 세웠는데, 그 숫자는 무려 16개에 달했다.

동진(東晉) 시대에 이르러, 16개 나라 중 저족(저族)들이 세운 전진(前秦)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전진의 왕 부견은 왕맹(王孟)을 국상(國相)으로 임용하여 작은 나라들을 쳐부수니, 전진의 판도는 중국의 북부 전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부견은 야심이 점점 더 커지자, 동진을 정복하여 중국을 통치하고자 하였다.
 
동진 정벌을 위해, 부견은 병력을 대규모로 증강하였는데, 성인 남자 10명중 한 명은 군에 입대하도록 하였으며, 재능이 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자제들은 모두 군관으로 뽑아갔다. 이렇게 하여 병력이 단숨에 97만 명으로 불어나자, 득의양양해진 부견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사마창명(司馬昌明), 사안(謝安), 환충(桓충)을 위해 벼슬자리를 준비해 두었소. 그들이 곧 우리에게 투항해 올 것이니, 이제 그들에게 줄 집이나 지어야겠소."

부견의 동생 부융(부融)이 부견에게 말했다.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은 모두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이 혼란하게 될 때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들 부유한 집안 출신 자제들은 전투 경험도 없는 데다, 고생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태자도 말을 했다.

"동진이 비록 지금 강남(江南)으로 물러나 있다고는 하지만, 그곳에는 장강(長江)이라는 천연의 방어벽이 있으며, 내부의 단결도 좋고, 부하들 가운데에는 어려움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저희들이 출병할 시기가 아직 되지 않았으니, 훈련을 더 받게 한 다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견은 이들의 말에 대하여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매우 오만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장강 험준한 게 뭐 별 것이겠는가? 우리들의 이 많은 군사들이 채찍을 하나씩 강물에 던져 넣어도 족히 강의 흐름을 끊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以吾之衆旅, 投鞭于江, 足斷其流)."

부견은 이들의 권고를 듣지 않고 남진하였다가, 비수(비水)의 전투에서 동진의 사현 등이 이끄는 군대에게 8만 명의 군사를 잃고, 낙양과 팽성을 잃는 참패에 자신의 목숨까지 보탰다.
 
[출전] 진서(晋書) 前秦載記
  


▶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범문란(范文瀾)은 전진(前秦) 황제 부견(苻堅)이 신임했던 재상 왕맹(王猛)을 역대 최고의 명장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왕맹은 전진의 부견왕을 섬기며 화북통일에 큰 공헌을 한 현신이다. 왕맹은 말단관직인 관사로 있다가 부견에 의해 시평(始平)의 현령으로 부임했다. 시평현은 경사(京師)의 서북문호로서 몹시 중요한 요새였지만 관리들의 횡포와 착취가 극심하고 강도와 도적들이 들끓어 백성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왕맹은 부임하자마자 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죄질이 무거운 자라면 왕족의 친척에게도 형벌을 서슴지 않았다. 


한번은 부견왕의 처남 강덕(强德)이 술에 취해 장안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며 재물을 빼앗고 여성들을 강간한 일이 있었다. 왕맹은 그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으로 때려죽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귀족세력들은 부견에게 상서를 올려 왕맹을 잡아들이라고 요구했고 결국 왕맹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부견왕이 직접 왕맹을 심문했다. "관리라면 도덕으로 사람을 감화시켜야 마땅하느니 부임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오?" 왕맹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점은 소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평한 나라라면 예의로 다스려야겠지만 예가 어지럽혀진 나라는 필히 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폐하께서 그곳에 소신을 보내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여 온 힘을 다해 나라를 어지럽히는 흉악하고 교활한 자들을 모조리 뿌리 뽑으려 했던 것입니다. 한 무리의 권세가들이 제거되어야 더이상 같은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처벌이 약했다면 소신을 벌해도 좋습니다. 허나 처벌이 지나쳤다고 원망하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부견은 왕맹의 말에 탄복하여 그를 삼공(三公)으로 승진시켜 재상에 임명했다. 그 후 왕맹은 부견을 보좌하여 내정을 개혁함으로써 사회 기풍을 바로잡고 백성들이 태평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했다. 또한 수차례 전쟁에서도 누차 공을 세워 10년 사이에 북방통일을 이룩했다. 북방이 견고해지자 부견은 자신의 세력을 남방의 진(晉)나라에까지 확장하려 했으나 왕맹의 반대에 줄곧 시행하지 못했다. 왕맹이 죽고 나서도 부견은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태원(太元) 8년에 진나라 정벌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또다시 대신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좌복사 권익(權翼)이 가장 먼저 반대했다. 


"폐하, 진나라 토벌은 아직 이릅니다. 오늘의 진나라는 비록 병력은 약하지만 이름난 장수인 사안(謝安)과 환충(桓沖)이 있습니다.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권익이 말이 끝나자 장군 석월(石越)도 반대하고 나섰다. 


"폐하, 진나라는 긴 장강을 천연 병풍으로 삼고 있고 나라를 보위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만 해왔기에 군주와 신하가 화목하고 단합되었으니 장군과 병사들이 하나로 뭉쳐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부로 공격했다간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두 장군의 말에 부견은 노기등등했다. 


"과인은 천하를 돌며 투편단류(投鞭斷流),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막았던 사람이오. 장강이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오? 내가 가진 장수와 병사들이 던진 채찍만으로도 장강을 막을 수 있을텐데 진나라가 무슨 수로 대항한단 말이오? " 부견은 대신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사흘 후 부견은 새롭게 장군을 임명하고 90만 대군을 친히 인솔하여 남하하였다. 이에 맞서 진(晉)나라는 장군 사안의 통솔하에 고작 8만 군사로 대적하였다. 결과는 진나라의 대승이었다. 부견이 이끈 대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자치통감•진서(資治通鑑•晉書)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자성어 "투편단류(投鞭斷流)"는 군사들이 손에 쥔 채찍만 던져도 강을 막는다는 말로서 군사가 많거나 군사력이 강대함을 비겨 이른다.




※) 20200522_youtube.jpg 사자성어 성어TV성어낭독, 성어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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