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방백세/류방백세(流芳百丗/流芳百世) ◑ liú fāng bǎi shì


▶ 流 흐를 유/류 芳 꽃다울 방 百 일백 백 世 대 세


▶ 향기가 백대에 걸쳐 흐름.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함. 훌륭한 명성(名聲)을 후세(後世)에 영원(永遠)히 전함을 비유한 말이다. 流:流传;芳:花草的香气;比喻好的名声;百世:古人以30年为一世;形容极为久远的时间。美好的名声在后世永久流传。也作“流芳千古”。 leave a good name for posterity.


流芳百世和“名垂青史”都有“美名流传于后世”的意思。但流芳百世用于人;也用于诗文;指在后代流传下来;“名垂青史”专指人;指在史书上流传下来。


▶ 동진(東晋) 시대, 진(晋)나라와 북방 이민족들은 서로 끊임없는 마찰을 빚어왔다. 서기 354년, 환온(桓溫)은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북벌에 나서 전진(前秦)을 공격했다. 함락한 지역의 한족(漢族)들의 협조로 그들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섬서 지역에서 전진의 주력부대인 5만 대군을 물리치며 도읍인 장안(長安)까지 압박해 들어갔다.

환온의 세 차례에 걸친 북벌은 저족(저族), 강족(羌族), 선비족(鮮卑族) 등 북방 이민족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서기 363년, 환온은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동진 조정에서는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였으니, 그의 지위는 제후들보다 위에 있게 되었다.

환온은 군사대권을 장악하고 중원(中原) 회복을 생각하며, 군사적 승리를 꾀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명망을 높여서 동진의 제위(帝位)를 빼앗아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환온은 "대장부가 훌륭한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 없다면, 죽은 뒤 나쁜 이름이라도 세상에 남겨야 한다[大丈夫不能流芳百世, 亦當遺臭萬年]"라는 말을 하였다.

서기 373년, 61세의 환온은 병을 앓으면서도 이러한 꿈을 버리지 않았으나, 재상(宰相) 사안(謝安)의 저지로 야심을 이루지 못했다.

[출전] 진서(晉書) 권98 반역전(叛逆傳)-환온(桓溫). 


▶ 동진(東晉)시기 환온(桓溫)은 용항(龍亢) 사람으로 자(字)는 원자(元子)이다. 왕망(王莽), 조조(曹操), 사마소(司馬昭), 왕돈(王敦)에 견줄만큼 공적이 뛰어났으며 정치적 야심 또한 대단했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물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환온은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뚝심이 남달랐다. 그가 15살이 되던 해에 부친 환이(桓彛)가 지방관리인 강파(江播)에 의해 살해당하자 매일 밤 창을 머리맡에 둔 채 잠을 자고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맹세했다. 


3년 뒤 부친을 살해한 강파가 병들어 죽자 환온은 복수심을 버리지 못하고 조문객으로 가장해 강파의 세 아들을 살해했다. 


당시 사람들은 환온의 이런 효심과 뚝심을 높이 칭송하였으며 더불어 그의 이름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온은 진명제의 딸 남강공주(南康公主)를 아내로 맞으면서 진명제의 사위 즉 부마도위로 등용되었다. 


환온은 조정에서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하며 깊은 정을 쌓았고 대신들의 신임을 받으며 서서히 주변 세력을 키워갔다. 


어느날 한 대신이 진명제에게 환온을 중용할 것을 간하였다. 


"환온은 재능이 뛰어나고 배포가 큰 인물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오니 왕께서는 그에게 다른 부마들과는 다른 관직을 내리시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를 새겨 들은 진명제는 환온을 형주자사(荊州刺史) 겸 양주도독(梁州都督) 그리고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 등용해 형주와 양주를 포함한 4개 주의 군사를 통솔하게 했다. 


동진 영화(永和) 2년 (346년), 환온이 34세 되던 해였다. 진나라와 북방 이민족들은 서로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환온은 중원(中原)을 회복하고자 군사를 거느리고 강릉(江陵)을 출발해 북벌(北伐)을 감행하였다. 


당시 섭정하고 있던 강헌태후(康獻太后)가 환온의 군사가 부족하다 여기어 반대했지만 환온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북벌에서 환온은 오랜 독립을 유지했던 성한(城漢:오늘의 사천 지역)을 단숨에 평정하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그의 뛰어난 군사력에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환온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등용되었고 그의 권세도 나날이 높아졌다. 


환온은 그 후로도 두차례 북벌을 더 진행하였다. 영화 12년 (356년) 2차 북벌에서 전진(前秦)을 공격해 이민족들을 굴복시키고 낙양을 수복하면서 또다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대사마(大司馬)의 자리에 오르는 등 동진 안밖의 군사를 장악하며 실권자가 되었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시기와 질투가 따르는 법, 대신들은 환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대신들은 환온을 동진 원제(元帝)때 반란을 일으킨 야심가인 왕돈에 비유하고 왕실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심가라 일컬으며 갖은 방법으로 훼방을 놓았다. 


이처럼 후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369년에 환온은 마지막으로 전연(前燕)에 대한 북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대군의 저지를 받은데다가 군량 수송까지 끊기면서 동진군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환온은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자라고 수근거리는 대신들 앞에서는 절대 자기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 없었으나 측근들 에게는 마음속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하루는 환온이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유방백세 못할 바에는 만세에 악명이라도 떨쳐야 하는데 그 조차도 이루지 못했구나." 


환온은 동진의 재상이었던 사안(謝安)의 작전에 걸려들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영강 원년(373년)에 병사하였다. 


'유방백세' 이 고사성어는 환온의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훌륭한 명성이 후세에 길이 전해진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 东晋时期,大司马桓温专揽朝政,他南征北战,立下不少战功。他位高权重,野心萌发,一次躺在床上说:“人生在世不能默默无闻。”亲信们不敢吭声,他从床上坐起接着说:“一个人即使不能流芳百世,那么就该遗臭万年。”


[출처] 南朝 宋 刘义庆 《世说新语 尤悔》 :“桓公卧语曰:‘作此寂寞,将为文景所笑。’既而屈起坐曰:‘既不能流芳后世,亦不足复遗臭万载耶?’”


[예문] 삼국지 将军若扶汉室,乃忠臣也,青史传名,流芳百世。 (明 罗贯中 《三国演义》第九回)


[동의어] 만고유방(萬古流芳) 영수부후(永垂不朽), 명수청사(名垂青史)


[반의어] 취명원양(臭名远扬), 유취만년(遗臭万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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