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한국의 야담 79
[상 진(尙震)의 칠순통(七純通)]
상 진은 호가 송현(松峴)으로 조선조 명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낸 분이며 성품이
순후하고 너그러웠다.
그의 아버지 상 보(尙甫)가 늦도록 아들이 없자 몸소 성주산(聖住山)에 기도하여
상 진을 낳았다.
상 진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7, 8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유몽정(柳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나이 15세가 지나도록 기질이 호방(豪放)하여 학문에는 뜻을 두지 않고 말이나
타고 활이나 쏘러 다니므로 친구들에게 괄시를 받았다.
그러자 상 진은 곧 학업에 분발하여 몇 해 안 가서 공부가 크게 성취되었다.
상 진은 식년과(式年科)에 합격한 뒤에 친구들과 산사(山寺)에 가서 회시(會試)
공부를 하였다.
이때 상 진은 황룡이 불탑(佛榻)에 둘러 있는 꿈을 꾸고는 매일같이 새벽에
세수하고 불탑 앞에 가서 분향하고 속으로 과거급제를 기원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 친구가 장난을 치려고 먼저 가서 불탑 뒤에 숨어서 상 진이 와서 기도하기를
기다렸다가 부처의 목소리처럼 꾸며 말했다.
"너의 정성이 갸륵하므로 회시에서 낼 강장(講章)을 내가 미리 너에게
알려주리라."
그리고는 칠서(七書) 중에서 각각 1장씩을 들며,
"너는 다만 전력하여 이것을 외운다면 과거에 오르는 일은 염려할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러자 상 진은,
"지시를 받자오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이후로는 오직 7장만을 외며
밤낮을 그치지 않으므로 그 친구는 속으로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진짜 부처의 교시인 줄 알고 철석같이 믿어 과거에 낭패라도
하게 되면 자기로 인한 탄식이 없지 않을 것을 염려하고 넌지시 말하였다.
"자네 단지 7장만 외는 데는 무슨 곡절이 있는가?"
상 진은 부처가 알려준 대로 대답하였다.
"참으로 어리석구만. 부처가 영험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과거시험 출제가 만일 이 장이 아니라면 어찌 실패를 보지 않겠는가?"
그 친구가 나무라자 상 진은 웃으면서 말했다.
"성의가 투철한 바에 신명도 감응하여 이 지시가 계신 것인데 어찌 영험이 없을
리 있겠는가?"
그 친구는 할 수 없이 속으로 민망히 여기고 실토하였다.
"이것은 나의 일시적인 장난이었는데 자네의 믿음이 이렇게까지 독실할 줄 미처
생각지 못하였네. 어찌 그리도 몹시 미혹되었는가?"
그러자 상 진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네. 나의 일편정성은 천지신명이 다 아시는 바인데 비록 강장을
가르쳐주려 하나 자세하게 직접 가리켜 줄 수 없기 때문에 자네를 통해 대신
가르쳐주게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옛날에 제사지낼 때 신위 대신으로 그 자리에
앉히던 어린 시동(尸童)이 신(神)의 말을 전하는 뜻과 같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자네의 이 일은 비록 장난에서 나온 것이나 자네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실은 하늘이 시킨 것이고 신이 명한 것인데 내가 어떻게 독실히
믿고 전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뒤에 상 진이 회시장에 들어가니 출제한 칠서의 강장이 과연 전력한 대목과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상 진은 단숨에 마치 병 속의 물을 쏟듯이 술술 외니 여러 시관들은 크게
칭찬하였다.
상 진은 드디어 칠순통(七純通 : 7장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욈)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동야휘집》
2001/05/06(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