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유리왕(琉璃王)

[참고] 부여:금와, 대소 신라:혁거세, 남해 백제:온조왕 중국:전한(前漢)

기원전 19년, 유리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유리(類利) 또는 유류(孺留)라 하며,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禮)씨이다. 주몽이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어 아이를 뱄었는데, 주몽이 떠나온 뒤에 태어났다.

유리가 어릴 때, 밭둑에서 새를 쏘다가 잘못하여 물 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깨뜨리게 되었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아비없이 자란 탓에 이처름 버릇이 없구나." 
하였다. 유리는 서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분입니까?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너희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시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받아 들이지 않으므로 멀리 남쪽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단다. 집을 떠날 때 나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내 유물을 일곱 모가 난 돌위의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찾게 하시오. 그것을 찾는 자가 나의 아들이 될 것이오' 하셨단다." 

예씨 부인이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리는 곧 산골짜기로 가서 일곱 모가 난 돌위의 소나무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유리가 집에 있으려니까 주춧돌 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가 나고 기둥은 소나무였다. 유리가 기둥 밑을 혜쳐 보니 칼 한조각이 나왔다. 

유리는 부러진 칼을 가지고 옥지, 구추, 도지 등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졸본 부여에 가서 주몽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가지고 있던 자기의 칼 도막과 그것을 맞추어 보니 꼭 맞아 비로소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고, 마침내 그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2년(기원전 18년) 7월에 유리왕은 다물주(多勿侯) 송양(松壤)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 9월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10월에 신작이 궁정의 뜰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 무렵 백제 시조 온조가 즉위하였다. 

3년(기원전 17년) 7월에 이궁을 골천(?川)에 지었다. 10월에 왕비 송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후 하희(골천 사람의 딸)와 치희라는 두 여인이 왕을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둘이 서로 시기하고 싸우다가 한나라(중국) 출신인 치희가 견디다 못해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때 왕은 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가 꾀꼬리가 노는 것을 보고 자기의 외로움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황조가(黃烏歌)] 

편편황조(翩翩黃鳥) 꾀꼬리는 오락가락 
자웅상의(雌雄相依) 암놈 수놈 놀건마는 
념아지독(念我之獨) 외롭구나, 이내 몸은 
수기여귀(誰其與歸) 뉘와 함께 돌아가리. 

11년(기원전 9년) 4월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선비(중국 북방의 오랑캐족)들은 지형이 험한 것만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이로우면 노략질을 일삼고 불리하면 들어가서 굳게 지키니, 우리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누구든지 이들을 무찔러 꺽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큰 상을 내리리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부분노는, 

"선비는 험하고 단단한 나라입니다. 그들은 용맹하지만 어리석어서 힘으로 싸우긴 어려워도 꾀로 싸우면 항복 받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왕이 물었다. 

"사람을 시켜 본국을 배신한 것처름 꾸며서 그곳으로 들여보낸 다음, 우리는 땅이 작고 군사가 약하여 움직이기를 싫어한다고 소문을 냅니다. 그러면 선비는 틀림없이 우리를 얕잡아보고 방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을 타서 정예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숲 속에 숨어 있고, 왕께서는 약한 병사를 앞세워 성 남쪽에서 싸움을 걸면, 그들은 반드시 성을 비워 놓고 멀리까지 쫓아 나올 것입니다. 그 때 신이 정예병을 이끌고 그 성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는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적을 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부분노의 말대로 하였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내어 쫓아왔다. 이 때 부분노가 정예병을 이끌고 성 안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는 크게 놀라 되돌아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막고 싸워 수많은 적을 베었다. 왕도 깃발을 높이 들고 북을 울리며 치고 나오니,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된 선비는 힘이 다하고 계교마저 없어 끝내 항복하고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치하하고 많은 농토를 상으로 주랴 했으나 부분노가, 

"이는 왕의 덕입니다. 신이 무슨 공이 이싸오리까?" 
하며 사양하므로, 그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필을 하사하였다. 

14년(기원전 6년) 정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수교를 하고 서로 질자(質子)를 교환하자고 청하였다. 태자 도절(都切)이 가지 않았다. 

11월 대소는 고구려가 질자를 교환하지 않자 앙심을 품고 군사 5만으로 졸본(卒本)을 침입했으나 많은 눈으로 군사가 많이 죽어 돌아갔다. 

22년(서기 3년) 눌현(訥見)【홀본부여성으로, 쌍성보진 편검성이다】으로부터 국내위나암성 (國內尉那巖城)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23년(서기 4년) 왕자 해명(海明)을 세워 태자로 책봉하였다. 

27년(서기 8년) 정월에 태자 해명은 옛 도읍지인 졸본에 있었다. 해명은 힘이 세고 무예와 용기가 뛰어났다. 황룡국(黃龍國) 【졸본부여의 고구려 여달왕 (閭達)으로 추정】왕이 태자의 소문을 듣고 해명에게 사람을 보내어 강한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은 그 사자를 만나 본 자리에서 활을 당겨 꺽으면서 말하기를, 

"내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이 굳세지 못하다." 
하였다. 황룡 왕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유리왕은 화를 내며 황룡왕에게 부탁하기를, 

"해명은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니 청하건데 나를 위하여 목을 베어 주시오." 
하였다. 

3월에 황룡 왕이 사람을 보내어 태자와 만나 보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떠나려 하자 한 사람이 말리면서, 

"지금 이웃 나라에서 아무 일도 없이 만나 보기를 청하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황룡 왕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하며 마침내 길을 떠나 황룡 왕을 만났다. 황룡 왕은 처음에 태자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를 만나 보고는 감히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예의를 다하여 돌려 보냈다. 

28년(서기 9년) 3월에 유리왕이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어 해명에게 전하기를,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힘센 것만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이것이 어찌 자식된 도리라 하겠는냐?" 

하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하였다. 태자가 스스로 죽으려 하자, 곁의 사람이 말하기를, 

"대왕의 큰아들이 이미 죽었으니, 장래에 당연히 왕위를 물려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자가 한 번밖에 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가벼이 목숨을 끊으려 하십니까? 혹시 그 말이 중간의 조작이라면 어찌하리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지난 번 황룡 왕이 센 활을 보내 주었을 때 나는 그가 우리나라를 가벼이 여길까 걱정되어서 활을 꺽어 본때를 보인 것이다. 그런데도 뜻밖에 부왕에게 꾸지람을 받게 되고 부왕께서는 불효자라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하시니, 내 어찌 어버님의 명을 거역하겠느냐?" 

하고 곧 동쪽 벌판으로 나가 땅에 창을 꽂고 달려가 죽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21세였다. 

31년(서기 12년) 한의 왕망(王莽)이 우리의 군사로 흉노(匈奴)를 침략했으나, 군사가 도망하니, 우리장수 연비(延丕)를 죽이고 우리의 변경을 자주 침략하였다. 
 
【연비(延丕) 후한서와 남북사에는 고구려후 추(鄒)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과라고도 한다. 이 고구려후 추가 바로 황룡국 여달왕으로 추정된다. 왕망은 이후에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하였는데, 졸본부여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32년(서기 13년) 11월 부여에서 군사를 일으켜 침략하자 왕자 무휼(無恤)이 나아가 부여군을 섬멸하였다. 

33년(서기 14년) 정월에 왕은 무휼을 세워 태자로 삼고 나라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8월에 오이, 마리 등에게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아가 양맥(梁貊)을 정벌하게 하여 멸망시키고 계속해서 앞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한(漢)나라의 고구려현(현도군에 속함)을 빼앗았다. 

37년(서기 18년) 10월 왕이 두곡(豆谷)의 이궁에서 돌아가니, 두곡의 동쪽 정원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nsgoguro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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