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참고] 부여:대소 신라:남해, 유리 백제:온조왕, 다루왕  
중국:신(新), 후한(後漢)

서기 18년, 대무신왕이 즉위하였다. 유리왕의 세째 아들로 이름은 무휼이다. 주류제(朱留帝)라고도 하며 모친은 송(松)씨로 다물국 송양의 딸이다. 왕은 나면서 부터 총명하더니, 자라면서 더욱 영특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2년(서기 19년) 백제민 1천여호가 항복해 왔다. 
 
4년(서기 21년) 12월 열제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여를 정벌하기 위해 비류수 상류로 행차하다 북명사람 괴유와 적곡사람 마로를 얻었다.

5년(서기 22년) 2월에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일대는 곳곳이 진흙 수렁이었으므로 왕은 평지를 가리어 군사를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쉬게 하여 전혀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부여 왕 대소(帶素)는 전국의 군사를 모아 싸우리고 하고, 고구려군이 미처 준비하기 전에 습격하기 위하여 급히 쳐왔다.그러나 진흙 수렁에 빠져 군사와 말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이 때를 이용하여 왕은 장수 괴유에게 명령을 내렸다.

괴유가 큰 칼을 빼어 들고 고함을 지르며 돌격하니, 수많은 적의 군사는 갈팡질팡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괴유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부여 왕을 잡아 목을 베었다. 왕을 잃은 부여 군사들은 크게 패하였지만, 항복하지 않고 오히려 겹겹히 고구려군을 포위하여 계속 싸웠다. 시일이 지나면서 고구려군은 먹을 것이 떨어져 군사들이 배를 주리게 되었다. 
 
왕은 천신의 도움을 빌었다. 그러자 갑자기 어디선가, 큰 안개가 밀려들어 7일 동안 사방을 덮어서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 구분할수 없게 되었다. 왕은 이 틈을 타서 군사들에게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였다. 허수아비에 무기를 들려 곳곳에 세워 놓고서야 군사들은 밤중에 몰래 탈춭할수 있었다. 
 
고구려로 돌아온후 왕은 큰 잔치를 베풀고,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본래 덕이 없으면서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부여를 쳤도다. 비록 부여 왕을 죽이긴 하였으나 그 나라를 멸망 시키지도 못하고,또한 우리의 군사를 많이 잃었으니, 이것은 모두 다 나의 잘못이다." 
 
그리고는 몸소 죽은 자의 가족과 병든자를 찾아가 슬픔을 위로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왕의 덕과 의로움에 감동하여 모두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하였다. 
 
4월 대소(帶素)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가에 이르러 나라(曷思國)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7월에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하여 낙(絡)씨로 성을 내렸다. 
 
9년(서기 26년) 10월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 하였다. 12월 구다국왕(句茶國王)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11년(서기 28년)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했으나 성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15년(서기 32년) 4월, 왕자 호동(好童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 에게서 난 소생)이 옥저(沃沮樂浪 지금의 함흥 지방)로 유람을 하였다. 이 때 낙랑 왕 최리(崔理)도 그곳을 돌아보다가 호동왕자를 만났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닌 듯하다. 혹시 고구려(北國) 왕(神王)의 아들이 아닌가?" 
 
낙랑 왕은 호동왕자를 데려다가 공주와 짝을 맺게 하였다. 그후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은 낙랑(樂浪)에 있는 공주(崔氏女)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공주여, 그대가 나라의 무고(武庫)에 들어가서 고각(鼓角-북과 피리)을 부수어 주시오. 그리하면 내가 예의를 다하여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맞이 하지 않겠소." 
하였다. 
 
낙랑에는 예로부터 이상한 북과 피리가 있어서 적병이 침략해 오면 저절로 울기 때문에 부수게 한것이다. 
 
호동이 비밀리에 전한 말을 들은 낙랑 공주는 잘 드는 칼을 가지고 몰래 무고(武庫)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칼로 북을 찟고 피리의 주둥이를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고 몰래 낙랑을 습격하였다. 
 
한편 낙랑 왕 최리는 북과 피리가 울지 않아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고구려군이 성 아래까지 들이닥친 후에야 북과 피리가 부서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딸인 공주를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11월에 왕자 호동은 모함을 받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12월 왕자 해우(解憂)가 태자에 봉해졌다. 
 
20년(서기 37년) 왕이 낙랑(樂浪)을 기습하여 멸하였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해성(海城)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44년) 광무제가 살수(薩水)까지 이르는 침략이 있었다. 이후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다시 속했다. 10월에 왕이 돌아가니, 대수촌 들(大獸村原)에 장사하고 시호를 대무신이라 하였다. 
[nsgoguro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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