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온조왕(溫祚王) 

[참고] 부여:금와, 대소 신라:혁거세, 남해, 유리 고구려:유리왕, 대무신왕 중국:전한(前漢), 신(新), 후한(後漢)

백제의 온조왕은 그 아버지가 그 아버지가 추모, 또는 주몽으로 알려져있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 부여로 왔을때 졸본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셋만 있었다. 그는 주몽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주몽의 딸로 삼게 하였다. 얼마후 졸본 부여왕이 돌아가자 주몽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주몽은 아들 둘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그 후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때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가 자기들을 용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는데, 많은 백성이 이들을 따라 떠났다. 

북한산에 이른 그들은 부아악 (지금의 삼각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며 살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자 10명의 신하들이 말리며, 

"생각해 보니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으로 한강이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산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또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있고 서쪽으로는 넓은 바다를 두고 있으니,이곳이야말로 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알맞은 곳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인천부근) 로 가서 살았다. 

한편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가 도와 주었다 하여 나라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신라 박혁거세가 40년, 고구려 유리왕 2년 (기원전 18년)이었다. 

한편 미추홀에 머물러 살던 비류는 땅이 질퍽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음을 알고 다시 위례성으로 옮겨 왔다. 비류는 미추홀을 고집한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죽었다. 그러자 비류의 백성과 신하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 왔다. 

온조는 모든 백성이 자진해서 따라왔으므로 나라 이름을 다시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왔기때문에 부여로 성을 삼았다.

 즉위 원년(기원전 19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지었다. 

2년(기원전 17년) 정월, 왕이 여러신하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구경에 붙어 있는데다가 사람들이 용감하고 속이기를 잘하여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른다. 그러나 병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방어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였다. 

3년(기원전 16년) 9월, 말갈이 국경의 북쪽을 침범하므로 왕이 강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싸워 크게 이겼다. 살아 돌아간 적은 열에 한둘뿐이었다. 

4년(기원전 15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8년(기원전 11년) 2월, 말갈병 3천이 몰래 칩입하여 위례성(慰禮城)을 포위 하였다. 10여일이 지나 양식이 떨어진 적은 그냥 물러나게 되었다. 이 때 왕은 날랜병사를 뽑아 댜부현까지 쫗아가서 싸워 이겼는데 죽은자와 포로가 5백여 명이었다.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 평안남도 맹산군 병풍산(屛風山;1166M) 남쪽 철옹산성(鐵甕山城))에는 철책을 세웠다. 

【마수성馬首城 요덕군 마유봉(馬踰峰;972M), 모도봉(毛都峰;1883M)과 관련하여 대동강 발원(發源)인 대흥군(大興郡) 신성면 창의리 부근으로 추정한다】 

그러자 낙랑(樂浪)태수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얼마 전에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자하여 한 집안처럼 여겼소.그런데 지금 우리 땅 가까이에 성책을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혹시 우리땅을 침범하기 위한것이 아니오? 만약 지금까지의 우호관계를 위해 성채를 헐어 버린다면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싸워서 승부를 내는 수밖에 없소." 

하였다. 왕이 회답하기를, 

"성책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로부터 모든나라가 해왔던 일이오. 어찌 이 일때문에 우리 사이가 변하겠소? 태수는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오. 만약 태수가 스스로 강함만 믿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고 이에 맞서 싸우겠소." 

하였다. 이 일 때문에 낙랑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11년(기원전 8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서 병산의 성채를 쳐서 부서 버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아갔다. 7월에 왕은 독산과 구천에 두성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13년(기원전 6년)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니 61세 였다.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자주 영토를 침범해 오므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국모(왕의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니 나쁜일이 있을까 걱정된다. 그래소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한강 남쪽을 두루 살펴보고 땅이 기름진것을 알았다.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오랬동안 편히 살길을 찾아야 겠다." 
라고 말하였다. 

7월에 한산(지금의 광주)에 성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8월에는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 옮긴 뜻을 전하고 마한과의 국경을 확정하니, 북쪽은 패하(浿河 예성강)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 임진강), 서쪽은 바다에 이르며, 동쪽은 주양(朱壤 춘천)에 이러렀다. 

9월 도성과 궁궐을 세웠다. 
 
14년(기원전 5년) 한산(漢山)으로 천도
 
15년(기원전 4년) 8월에 석두성과 고목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을 이끌고 부현 동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갈 군사를 만나 단번에 이기고, 사로잡은 포로는 병사들에게 노예로 나누어 주었다. 
 
17년(기원전 2년) 낙랑이 침략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22년(서기 4년) 9월 왕이 1천 기병으로 부현(斧峴 평양과 순안 사이로 추정) 동쪽에서 말갈과 만나 싸워 이겼다. 
 
26년(서기 8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馬韓)은 점점 쇠약해지고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이 왕을 떠나 있어 오래 견디지 못할것이다. 만일 남에게 이곳을 빼앗긴다면 그 때는 후회하더라고 이미 늦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쳐서 빼앗아 후일의 위협을 예방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10월에 왕은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내어 마한(馬韓)을 쳐서 빼앗았다. 다만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두 성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9년) 4월에 원산성과 금현성이 항복하였다. 두성의 백성을 한산 북쪽으로 옮겨 살게 하니. 마침내 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28년(서기 10년) 2월 원자 다루(多婁)를 태자에 봉했다. 
 
36년(서기 18년) 7월 탕정성(湯井城 충청남도 온양의 온양성)을 축조하였다. 
 
40년(서기 22년) 말갈이 침입하니 왕이 기병을 내어 막았다. 
 
43년(서기 25년) 10월 남옥저(南沃沮-대련반도)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구가 부양에 와서 살기를 청하니 한산 서쪽에 살게 하였다. 
 
46년(서기 28년) 2월, 왕이 세상을 떠났다.
[nsbakj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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