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대 의자왕(義慈王)

[참고] 신라: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고구려:영류왕, 보장왕 중국:당(唐)

서기 641년, 의자왕이 즉위하니 무왕의 맏아들이다. 위엄이 있고 용감했으며 담력과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3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서 당시의 사람들이 해동 증자라 불렀다.

2년(서기 642년) 2월에 왕이 각 주와 군을 돌아보며 죽을 죄를 지은 죄수 외에는 모두 풀어 주었다. 7월에는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서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에는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게 하여 대야성(합천)을 쳤다. 성주 품석이 가족과 함께 항복하니 윤충이 모두 죽이고 머리를 베어 왕도(부여)로 보냈다. 또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지방에 나누어 살게 하는 한편,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치하하고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상으로 주었다.

3년(서기 643년) 11월 고구려와 화친하였다.

4년(서기 644년) 9월, 신라장군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7개 성을 빼앗았다.

7년(서기 647년) 10월,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과 동잠성을 쳤다.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 병졸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의직은 오직 한 마리 말에 의지하여 돌아왔다.

8년(서기 648녀) 3월에 의직(義直)이 신라의 서쪽 변경을 쳐서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빼앗았다. 4월에는 옥문 골짜기로 진격했는데 신라의 김유신과 두 번 싸워 두 번 다 패하였다.

9년(서기 649년) 8월, 왕이 좌장군 은상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7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 등 7성을 쳐서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백제군을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흩어진 군사를 모아 도살성 아래에 머물러 다시 싸웠다.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15년(서기 655년) 2월에 태자궁을 아주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지었다. 5월에 붉은 색 말 한 마리가 북쪽 산의 오함사에 들어와 울면서 며칠간 법당을 돌다가 죽었다.

8월에는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30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자 신라 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 사실을 고해 바쳤다.

16년(서기 656년) 3월, 왕이 궁 안의 사람들과 어울려 술과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올바른 말을 아뢰자, 왕이 노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 후부터 감히 말리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중에서 죽었는데 죽음이 가깝자 왕에게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살펴보니 멀지 않아 큰 전쟁이 있을 듯하옵니다. 병사를 쓸 때는 지리를 살펴, 강 상류에서 적을 막아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적이 쳐들어오면 육지에서는 침현(대덕군 마도령)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장항) 연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런 험한 곳에서 적을 막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년(서기 659년) 2월에 여러 마리 여우가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 흰 여우가 상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5월에는 왕도 서남쪽의 사비하(금강)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 9월에는 궁중의 괴목이 마치 사람 소리같이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궁성 남쪽 길에서 크게 울었다.

20년(서기 660년) 2월, 왕도의 우물물이 핓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이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4월에는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또 왕도의 사람들이 까닭없이놀라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처럼 달아나다가 엎어져 죽는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재물을 잃는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5월에 폭풍우가 불었다. 천왕사와 도양사 두 절의 탑에 벼락이 떨어지고,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또한 왕도의 모든 개들이 길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더니 조금 있다가 흩어졌다.

어느 날은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 보게 했더니 한 마리의 거북이 나왔다. 그 등에는 '백제는 보름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했다. 왕은 이상히 여겨 점쟁이(무당)에게 물었다.

"보름달이라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이니 차면 기울 것이요, 초승달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이니, 점점 차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점쟁이가 이렇게 대답하자 왕은 화를 내며 죽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름달은 크게 성한 것을 뜻하고, 초승달은 작고 미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백제는 점점 성하고 신라는 점점 약해진다는 뜻인가 합니다."

하였다. 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 고종은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장군 유백영(劉佰英) 풍사귀(馮士貴) 방효공(龐孝公) 등 총 13만 군사를 이끌게 하여 백제를 쳐들어 왔다.

이와 함께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 에게 5만 정예군으로 나가게 하였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좌평 의직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군사는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처음 육지에 내려서 사기가 높지 못할 때 급히 치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라는 큰 나라의 도움을 믿고 있어 우리를 가벼이 여기겠지만, 당군이 패하면 두려워하여 감히 쳐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 할 것이므로 그 기세를 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군은 과가 여러 번 우리에게 패했으므로 우리의 힘을 두려워 핳 것입니다.

그러니 당군의 길을 막아 그들이 피로할 때를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 신라를 쳐서 꺽은 후에 힘을 합쳐 당군과 싸우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마리지현(전남 장흥)에 유배되어 있던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흥수가 말하기를,

"당군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서로 돕고 있으니 평야 지대에서 싸운다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기벌포)과 탄현(침현)은 우리 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이니, 마땅히 용감한 병사를 가려 뽑아 이곳을 지키게 하여 당병이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대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다가 적의 양식이 다하고 병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힘써 싸운다면 반드시 적병을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유배되어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당군이 백강으로 들어와서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오솔길에서 말을 정렬시킬 수 없게 한 다음, 그 때를 틈타 적을 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 속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따랐다.

그러던 중 당군과 신라군이 벌써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네 번 싸워 네 번 이겼으나, 결국 병사가 적고 힘이 다하여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왕은 다시 군사를 모아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한편 소정방은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백제군은 당군과 싸워 크게 패하였다.

당군은 밀물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강을 오르며 북을 치고 떠들어 댔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백제군이 힘써 막았으나, 다시 패하여 죽은 자만 1만여 명이 넘었다. 당군이 점차 성으로 밀려드니 왕은 크게 탄식하며,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됐으니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구나."

하고, 마침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사비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이끌고 성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태자의 아들인 문사가 아우인 융 (隆)에게 말하기를,

"왕과 태자가 밖으로 나갔는데, 숙부가 마음대로 왕이 됐구나. 만일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나면 우리 역시 안전할 수 있겠느냐?"

하고는, 따르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줄에 매달려 성 밖으로 나갔다. 백성들도 모두 그들을 따르니 태가 말릴 수 없었다. 소정방의 군사들이 성벽으로 뛰어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웠다. 태는 더 견딜 수 없어 항복했다. 그러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을 들어 함께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과 태자 효(孝), 그리고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만2천8백7명을 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보냈다. 임금이 승하하자 손호(孫皓) 진숙보(陣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 하였다.

백제에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가 있었다. 그러나 당군은 그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안에 주와 현을 두었다. 그리고 각 지방의 유지를 가려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다스리게 하고, 당나라 장군 유인원에게는 도성을 지키게 하고, 좌장군 왕문도는 웅진 도독으로 삼아 백제의 남은 백성들을 위로하며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도 일찌기 장수의 경력이 있었는데, 의자왕이 항복한 후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유성(周留城 한산읍)에 머물면서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왕자 부여 풍(夫餘豊)을 맞아 왕으로 삼고 항복하지 않았다.

백제 북서부의 모든 백성이 이들을 따르니, 한때 잃은 나라를 되찾으려는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오르기도 했으나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큰 세력에 밀리고 내부에서 복신과 부여풍이 서로 미워하여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고, 왜국의 구원병이 백강(白江) 어구에서 멸하니 부여풍은 피하여 도망하니 그 간곳을 알지 못하였다.

당고종이 융(隆)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귀국케 하였으나 당군과 헤어짐이 무서워 당으로 돌아가 신라가 강성함에 감히 본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 땅에서 죽었다.

이로써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nsbakj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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