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참고] 백제:무왕, 의자왕 고구려:영류왕, 보장왕 중국:당(唐)

서기 632년,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으로 진평왕의 큰딸이다. 덕만은 그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우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였다. 백성들이 덕만을 임금으로 세우고 성조 황고라는 호를 바쳤다.

진평왕 때의 일이다. 당나라에서 모란꽃 그림과 함께 그 꽃의 씨를 얻어 와서 덕만에게 보였더니,

"이 꽃은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향기가 없습니다."

하고 덕만이 말했다. 왕이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하고 물었다.

"이 꽃의 그림을 보니 벌이나 나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자가 아름다우면 남자가 기뻐하며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것이 아닙니까? 이 꽃은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도 없을 것입니다."

덕만이 대답하였다.

씨를 뿌려 꽃을 피웠더니 과연 덕만이 말한 바와 같았다. 덕만은 모든 일을 판단하는 것이 이처럼 명석했다.

왕은 즉위하자, 대신 을제에게 나라의 정치를 모두 맡아 보게 하였다. 5월에 가뭄이 심했는데 6월에야 겨우 비가 내렸다. 10월에 왕은 각지로 사람을 보내어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 등 혼자 힘으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여 주었다.

3년(서기 634년) 정월에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다. 이 무렵에 분황사(芬皇寺) 가 준공되었다.

5년(서기 636년) 정월에 이찬 수품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월에 왕이 병들었는데, 의원을 불러 약을 쓰고 기도를 올렸으나 효력이 없었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마련하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읽게 하였으며, 1백 명의 사람들에게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5월에 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연못)로 모여들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에게,

"두꺼비와 개구리는 눈의 생김이 성난 것 같으니, 이것은 군사들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방에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의 징조를 보니 반드시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침범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장군 알천과 필탄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무찌르게 하였다. 알천 등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과연 왕의 말과 같이 백제의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옥문곡에 숨어 있었다. 알천 등은 적을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이 무렵 자장 법사가 당나라로 가서 불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7년(서기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북쪽 변방의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적성)을 공격해 오므로 백성들이 크게 놀라서 산골짜기로 피난하느라고 소란하였다. 왕은 장군 알천(閼川)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들을 한데 모아 살게 하였다.

11월에 알천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많은 적군을 베어 죽이고 사로잡기도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1년(서기 642년) 7월에 백제 의자왕이 대군을 일으켜 도성 서쪽의 40여 성을 점령하였다. 8월에 백제는 다시 고구려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침공해 왔다. 적은 당항성(남양)을 점령하여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끊어 버리려 하였다.
이에 왕은 사신을 당 태종에게 보내어 위급한 사태를 알렸다. 같은 달에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쳐서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전사했다.

겨을이 되자 왕은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 싸움에 진 것을 보복하려고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대야성 싸움에서 전사한 품석의 아내도 함께 죽음을 당했는데, 그녀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이 때 김춘추는 이 슬픈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동물이 앞을 지나가도 살펴보지 않았다.

그는 얼마 후 말하기를,

"슬프다.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서 어찌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할 것인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뵈었다고 한다. 그는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원하옵기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여 원수를 갚을까 하옵니다."

하였다. 왕도 허락하였다.

마침내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보장왕은 평소부터 김춘추의 이름을 많이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군사들에게 엄중히 호위를 시킨 뒤에 그를 만나게 되었다.

김춘추가 먼저 아뢰었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징그러운 뱀이나 큰 돼지처럼 욕심을 부리고 있어 우리나라 땅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임금님은 큰 나라인 고구려의 구원병을 얻어 백제의 침략군을 물리치고자 소신을 보냈습니다. 부디 구원병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보장왕은,

"죽령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땅이니 그대들이 만약 죽령 서북지방을 우리에게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 돕겠다."

하고 말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대답하기를,

"소신은 왕의 명을 받들고 구원병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우리의 어려움을 구원하고 친선할 뜻은 비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사신으로 온 사람을 위협하여 영토를 내놓아라 하시니,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구원병 청하는 일 외에는 말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보장왕은 그 말이 매우 불손하다 하여 크게 화를 내면서 김춘추를 옥에 가두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된 김춘추는 몰래 신라에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다.

신라 왕은 대장군인 김유신에게 결사대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로 가서 김춘추를 구원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결사대를 지휘하여 한강을 지나 고구려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의 보장왕은 마침내 김춘추를 풀어 주었다. 이 때 왕은 대장군 김유신을 압량주(지금의 경산) 군주로 삼았다.

12년(서기 643년) 3월에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던 자장이 돌아왔다. 9월에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의 영토를 침략하여 수십 개의 성이 자주 그들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서로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를 칠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번 9월에는 그들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올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 신라는 끝내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사신을 보내어 큰 나라의 군사를 청하오니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당 태종은 사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진심으로 그대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사신을 보낼 때마다 그대들 세 나라가 친밀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만 지나면 다시 그대 나라의 땅을 삼키려고 하니, 그대 나라에서는 어떤 계책을 세워 그들의 침략을 물리치려고 하느냐?"

하고 물었다. 사신이 말하였다.

"우리는 계책이 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이 위급한 일을 큰 나라에 알려서 나라를 보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당태종이 다시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어 글안(거란)과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하면, 그대 나라의 위급한 일이 풀리게 되어 적어도 1년쯤은 근심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 우리 군사가 계속 머물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히려 침략을 더 자주 할 것이니, 우리 네 나라가 모두 혼란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물론 그대 나라도 평안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 계책이다.

만약 우리가 그대 나라에 수천 벌의 붉은 군복과 붉은 깃발을 주면,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가 쳐들어와도 이 깃발을 꽂고 군사를 벌여 세워두면, 그들은 이것을 보고 우리 군사가 온 것으로 알아 반드시 도망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계획이라 할 것이다.

백제는 바닷가의 험난한 지세만 믿고 병사들의 무기를 수리하지 않고 있다. 또한 남자들은 날마다 서로 어울려 잔치만 베풀며 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수백 척의 전선에 군사를 싣고 몰래 바다를 건너 백제의 땅으로 쳐들어가고 싶지만, 그대 나라는 왕으로, 여자를 세워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므로, 잘못하면 왕을 잃고 도둑을 맞아들인 꼴이 되어 해마다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친척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세우고 싶다. 그리고 그 친척이 홀로 가서 있을 수는 없으므로 군사를 보내어 왕을 지키도록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있다가 그대들이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때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어떤 방법이 좋은지 깊이 생각해 보라. 과연 어느 것이 좋겠는가?"

그러자 사신은 어물거리고만 있을 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당 태종은 그 사신이 재주 없는 사람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구원병을 청할 만한 외교 능력이 없는 자라고 한탄하였다.

13년(서기 644년) 정월에 당 태종은 사농 승상인 이현장에게 국서를 주어 고구려로 보냈다. 국서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는 나라로 예물 바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는 백제와 함께 즉시 군사를 거두고 싸움을 그만두어라. 만약 다시 신라를 침범하면 이듬해에는 반드시 우리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국서를 받아 본 연 개소문은,

"고구려는 신라와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지 오래 되었다. 지난날 수나라 군사가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5백 리를 침범하여 그 성읍을 지금까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신라가 이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군사를 거둘 수가 없다."

하고, 이현장에게 말하였다. 이현장은 다시,

"이미 지난 일을 새삼 거슬러 따져거 무엇하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연 개소문은 끝내 이현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9월에 왕은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그는 백제로 쳐들어가서 승리를 거두고 7개의 성을 빼앗았다.

14년(서기 645년) 정월에 김유신이 백제 정벌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백제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므로 왕은 김유신에게 이를 막도록 명하였다. 김유신은 집에 들를 틈도 없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백제군을 물리치고 적병 2천 명을 베었다.

김유신은 3월에야 돌아와서 왕에게 싸움의 결과를 알렸다. 그러나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다시 백제군이 변방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라의 형편이 위급하므로 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라가 보전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것이 오직 장군 한 몸에 달려 있으니, 모든 어려움을 무릎쓰고 다시 싸움터로 나가 적을 막도록 하라."

이에 김유신은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서쪽 변방의 싸움터로 달려갔다. 김유신이 자기 집 앞을 지날 때 집안의 남녀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3월에 황룡사탑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자장 법사의 청으로 건립한 것이다.

5월에 당 태종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신라 왕은 군사 3만 명을 출동시켜 도왔다. 이 기회를 틈타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두리를 쳐서 빼앗았다.

16년(서기 647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은 바른 정치를 베풀지 못한다고 비난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대궐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달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


【구토설화(龜兎說話)】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병들어 앓고 있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토끼의 간을 구해서 약을 지어 먹으면 낳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토끼가 없으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 한 거북이 용왕께 자신이 구해오겠노라고 아뢰었다. 거북은 마침내 육지에 올라 토끼에게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한 섬이 있고 그곳에는 맑은 샘과 맛있는 과일이 많고 날씨도 적당하며 매나 독수리들도 없다."

고 하였다. 그리고는 한 2, 3리 헤엄쳐 가다가 거북이 토끼를 돌아보며 잡아가는 진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토끼는 말하기를

"나는 신령의 후예이므로 간을 내어 씻었다가 다시 넣곤 한다. 마침 그것을 내어서 바위 위에 말려두었다. 나는 간이 없어도 사는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는냐 ?"

고 했다. 거북은 토끼의 이 말을 믿고 토끼를 도로 업고 돌아서서 육지로 올라갔다. 토끼는 풀숲으로 뛰어들어가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어리석구나. 이 거북아. 어찌 간 없이도 사는 놈이 있단 말이냐 ?" 하였다.

거북은 가련하게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 구토지설

*이 설화는 토끼로 대표되는 평범한 인물의 지혜로운 행동과 거북, 용왕으로 대표되는 지배자의 강압과 무능함을 대비시켜 토끼의 생기발랄한 성격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후대 판소리, 소설로도 전승된다.

이 이야기는 불경에도 나오며 일찍이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갔다가 옥에 갇혔을 때, 고구려의 신하인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자 그가 탈출을 암시하며 춘추에게 알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출전] 삼국사기 권 41 열전 '김유신조'

【김유신(金庾信)】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에 고구려 첩자 백석 (白石)이라는 자의 꼬임에 빠졌는데, 낭자로 변한 호국신(護國神)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는 내용의 이야기.

또 천관녀(天官女)라는 아름다운 여인의 꾐에 빠져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뒤로 그녀를 멀리 했는데, 어느날 술에 취했을 때 말이 평소의 습관대로 그녀의 집으로 가자 아끼던 명마(名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전] 삼국유사 권1 '김유신조'


【선덕여왕(善德女王)】
선덕여왕이 당(唐)나라 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았다. 그리고 그 때 함께 보내온 모란씨를 심어 꽃이 피었는데 과연 향기가 없었다.

신하들이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안 이유를 묻자 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음을 보고 알았다고 하고, 그것이 홀로 사는 자신을 풍자한 거시이라 하였다.

또 겨울에 못[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삼사 일을 계속 울자, 그것이 적군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는 징조임을 알고 여왕은 군사들을 풀어 여근곡(女根谷)을 찾으라 했다. 과연 그곳에는 백제군들이 숨어 있어 그들을 모두 무찔렀다.

뒷날 신하들이 미리 안 이유를 물었다. 여왕은 대답하기를 개구리는 노(怒)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병화(兵火)를 의미하는 것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성을, 그리고 음(陰)을 상징하는데, 빛깔로는 흰빛이고 흰빛은 서방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쪽에 병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죽을 때는 자기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라는 절이 창건(創建) 될 것을 미리 알았다는 전설이다.

[출전] '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

【지귀설화(志鬼說話)】

이 이야기의 제목을 [심화요탑]이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활리역에 지귀(志鬼)라는 사람이 여왕을 사모하다가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분향을 위해 행차하는 길을 막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린 지귀는 여왕의 배려로 여왕의 행차를 뒤따르게 되었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그 광경을 보고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찌를 보고서는 가슴이 타들어가 급기야 화신(火神)이 되고 만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온 세상에 떠돌아 다니자 사람들은 두려어 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 후 백성들은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이 때 여왕이 지어주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의 불이 제 몸을 태워 불귀신이 되었으매 마땅히 창해 밖에 추방하여 이제 다시 돌보지 않겠노라."

[출전] 박인량의 '수이전'에 실려 있다가 지금은 '대동운부군옥'에 실려 있는 이야기. [nssillak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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