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3·1(삼일) 운동 三一運動
 
1919년 3월 1일에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맞서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 기미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엄밀한 뜻에서는 불법으로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국권 회복 투쟁’이었다. 

배경과 동기  

우리 나라는 1904년에 한·일 의정서가 협정된 이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에 끊임없이 시달려 오다가 1910년에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주권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로부터 일본은 우리 겨레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무단 정치로써 탄압과 착취를 일삼았다. 교육 정책면에서는 우민 정책을 써서 민족 의식이 싹트는 근원을 없애려 하였다. 
  
일본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수많은 애국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국내대로 지식인과 종교인을 비롯해 학생,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 까지 반일 감정이 날로 더해 가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고, 1918년 1월에 있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평화 14개조 가운데서 ‘민족 자결 원칙’을 내놓았다. 이 민족 자결 원칙은 항일 독립 투사들에게 크게 용기를 복돋우어 주는 바가 되었다. 
  
그와 같은 세계 조류 속에서 1919년 1월 22일에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이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온 국민의 분노는 극도에 이르렀다. 

경과  

민족 자결의 원칙이 제창되고부터 국권 회복 문제가 국제적으로 유리한 처지에 놓인데다가 고종의 독살설로 국민의 항일 감정이 극도에 이르렀을 즈음,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우리 유학생들에 의해 항일 투쟁의 횃불이 올랐다. 
  
1919년 2월 8일(이팔)에 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학우회 총회라는 모임을 갖고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일본 의회에 보내고, 한편 주일 외교 기관과 언론 기관 등에도 두루 보내었다. 
  
이 사실은 사전에 국내 각계 지도자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국내대로 종교계, 교육계 지도자들 사이에 은밀히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진행 되고 있었다. 
  
1919년 2월 초 이미 권동진, 오세창, 최인 등이 손병희와 독립 선언에 관한 의논이 있었고, 다시 송진우, 현상윤, 최인, 최남선 등이 독립 선언의 진행 방법을 검토하였다. 
  
한편 이승훈이 크리스트교측에서, 최인이 천도교측에서 많은 동지를 모았고, 불교측에서 한용운과 백용성이 가담하게 되었다. 결국 크리스트교측 16명, 천도교측 15명, 불교측 2명의 33인이 민족 대표로 선정되고, 총대표로 손병희를 추대하였다. 
  
마침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 : 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려고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학생들은 3월 1일 정오에 탑골 공원(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고, 민족 대표들은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을 독립 선언 장소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학생과 시민들이 탑골 공원에 모여들었고, 하오 2시에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2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 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시위로 들어갔다. 
  
한편 하오 2시에 태화관에서도 민족 대표들이 모인 앞에서 한용운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뒤, 일본 경찰에 취지를 통고하고 자진해서 체포되었다. 이에 앞서 그들은 일본 정부에 독립 선언서와 독립 통고문을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 회의에도 독립 탄원서를 전달했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운동은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갔다. 
  
독립 선언문의 내용

최남선이 기초하고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붙인 이 글은 세계적인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언문의 내용은 독립 선언의 취지, 독립 선언의 정당성, 우리 민족의 피해 상황, 독립 쟁취의 신념과 의의, 민족의 결의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공약 3장에는 배타적 감정 억제, 정당한 의사 발표, 광명 정대한 비폭력적 행동 자세를 떳떳하게 밝히고 있다. 
  
운동의 확대 

3월 1일 당일로부터 전국적으로 시위와 만세 소리가 끊임없었고, 서울은 고종의 국장 당일인 3월 3일만 삼갔을 뿐, 날마다 가두 시위를 벌이며 총독부의 총칼에 맞섰다. 
  
거족적인 운동은 3월과 4월에 걸쳐 절정에 이르렀으며, 나중에는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까지 퍼져 나갔다. 
  
탄압 

일본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투옥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원 제암리에서 있은 학살이다.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 넣은 다음 출입구를 막아 놓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그 작은 마을에서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그 밖에도 화수리, 정주, 맹산, 강서, 대구, 밀양, 합천 등지에서의 집단 학살과 유관순의 참살 등은 우리 겨레가 영원히 잊지 못할 참혹한 만행이었다. 
  
결과 

이 운동이 시작된 지 3개월 동안 211곳에서 200여 만 명이 참가하였다. 모인 횟수만도 154회에, 총이나 칼을 맞고 죽은 동포가 7,509명이고, 다친 사람은 1만 5,961명이나 되었다. 또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은 4만 6,948명이었다. 
  
집 715채가 타고, 교회 47개, 학교 2개, 면사무소 47개소도 타 버렸거나 크게 부서졌다. 특히 다친 사람은 눈이 빠지거나 다리, 귀, 코가 잘린 경우가 많았다. 온 겨레가 떨치고 일어선 국권 회복 운동은 일본 헌병 경찰과 군대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수많은 희생자만 낸 채 실패로 끝났다.  

3·1 운동의 실패 원인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① 평화적인 시위 운동에 그친 점에 있고,  
② 하나의 뚜렷한 지도 체계가 없어서 통일된 투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1 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의 눈총을 의식하여 이전까지의 탄압 정책에서 이른바 문화 정책이라는 위장 술책으로 탈바꿈하였다.  

의의  

① 3·1 운동을 계기로 온 겨레가 우리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② 3·1 운동을 통하여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자주민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다. 
  
③ 민족의 강한 의지와 저력을 과시함으로써 세계 여러 나라에게 한국의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④ 3·1 운동은 중국, 인도 그 밖의 중동 지역에서의 식민지 해방 운동의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다. 
  
⑤ 3·1 운동을 계기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국권 회복 운동으로 발전 시키려는 의지가 싹텄다. 그리하여 1919년 4월에는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국권 회복 운동의 지도 기관이 되었다. 
  
⑥ 삼일 정신은 이후 국권 회복 투쟁의 정신적 전통으로 계승되었고, 오늘 날에는 민족 정신, 자유 정신, 평화 정신으로 승화해 영원한 민족의 지표가 되었다.  
   
■ 3·1 정신 三一精神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던 거족적인 3·1 운동의 정신. 
  
침략자인 일본의 무력적 탄압에 맞서 일어났던 3·1 운동의 근본 정신인 자주적 민족 정신, 자유 정신, 평화 정신을 말한다. 
  
곧 다른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용납하지 않는 자주적 민족 정신, 강압으로 빼앗긴 국권과 자유를 되찾으려는 자유 정신, 평화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뜻을 편 평화 정신이 곧 3·1 정신이다. [nsilje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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