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해모수(解慕漱) 첫해(기원전 239년)가 임술(BC239)년이다.
본래 고리국 사람으로 수유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웅심산【熊心山흥안령(興安嶺) 으로 추정】을 의지하여 일어나 집을 난빈(蘭濱) 에 지었다.
【고리국 藁離國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킨 곳으로 [삼국유사]에서 북부여 시조 해모수 (解牟漱)가 대요국 의주계(醫州界)에 있는 홀승골(忽昇骨)에 도읍 하였다고 전한다. 신개하(新開河) 유역의 과이심 좌익중기(科爾沁左翼中旗) 육가자(六家子) 문화로 고려된다】
2년(기원전 238년)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연호법【烟戶法 사람과 집 수를 조사하여 해마다 나라에 보고하는 법】을 세웠으며 오가의 군사를 나누어 두고 둔전을 작급하게 하여 불시의 근심이 있을 때를 대비하게 하였다.
8년(기원전 231년)에 임금이 무리를 거느리고 옛 도읍에 가서 깨우치니 오가 (五加)가 드디어 공화(共和) 의 정치를 철폐하고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을 삼았다.
11년(기원전 228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를 습격 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해 갔다.
19년(기원전 220년)에 비(丕)가 죽고 아들 준(準)이 아버지를 이어 번조선 番朝鮮) 왕이 되었다. 연(燕)이 장수 진개(秦介)를 보내어 우리의 서부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만번한 滿番汗 부신시 하얼투(哈爾套) 서남쪽의 탑영자향(塔營子鄕) 만한영자촌 (滿漢營子村)으로 추정】
20년(기원전 219년)에 명을 내려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게 하고 7월에 새 궁궐 366간을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22년(기원전 217년)에 창해(滄海)의 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인(韓人) 장량 (張良)과 더불어 박랑(博浪)의 모래 가운데서 진(秦)왕 정(政)을 저격하다가 잘못하여 부거【副車 본인이 타지 않고 여벌로 따라가는 수레】를 맞췄다.
【장량 張良 전한(前漢)때의 공신 소하(簫何)·한신(韓信)과 함께 한의 삼걸(三傑)의 한 사람】
【박랑 博浪 장량(張良)이 역사(力士)에게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하게 한곳,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양무현(陽武縣) 남쪽에 있다】
31년(기원전 208년)에 진승(陳勝)이 군사를 일으키자 진(秦)나라 사람이 크게 어지러워지니 연(燕)·제(齊)·조(趙)의 백성이 번조선으로 도망 온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 운장(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수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였다.
38년(기원전 201년)에 연의 노관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의 한계를 패수【浿水 요중현(遼中縣)으로 추정】로 하였다.
【노관 한(漢)의 풍(豊) 땅사람으로서 고조와 한 마을에 살고 같은 날 낳았다고 하여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뒤에는 흉노로 항복해 들어가 동호로왕(東胡盧王)에 봉해졌다】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의 한계를 패수【浿水 요중현(遼中縣)으로 추정】
45년(기원전 194년)에 연의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凶奴)로 들어오자 그 무리 위만(衛滿)이 우리에게 도망올 것을 요구했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위만(衛滿) 유방이 죽자 노관은 여황후(呂皇后)의 전횡(유씨 왕, 즉 자기 아들이 아닌 왕은 다 죽여버리는 처사)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흉노에 망명하였다. 이때 노관의 부하인 위만이 번한(后新秋)으로 망명하였고, 번한왕은 위만에게 연나라와의 경계에 살면서 상하 운장(上下 雲章; 閭陽 + 黃泥崖)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번한왕 기준(箕準)을 속여서 번한성에 입성하였고 번한왕을 내몰 았으며 스스로 번한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금이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단안을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많은 기회를 잃으므로 드디어 위만을 받들어 박사(博士) 를 삼고 상하 운장(雲障)을 나누어 봉하였다.
【운장(雲障) 조선과 부여의 전방 전초기지로 만번한 지역을 가리킨다. 군사적 목적이 강한 자치 행정구역적 성격을 띤 조직으로 생각되어진다. 상운장은 당시의 구려하인 유하근처이고, 하운장은 압록수인 요하 하류 반산(盤山)이 된다】
이 해 겨울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태자 모수리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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