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참고] 백제:의자왕 고구려:보장왕 중국:당(唐)

서기 654년 태종(太宗) 무열(武烈)왕이 왕위를 이었다. 왕의 이름은 춘추 (春秋)로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왕은 몸가짐이 뛰어나고 어려서부터 나라를 다스릴 큰뜻을 품고 있었다. 진덕왕을 섬겨 직위가 이찬 벼슬에 올랐고, 당나라 황제로부터 특진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진덕왕이 돌아가자 많은 신하들은 이찬 벼슬에 있는 알천에게 섭정을 보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알천은 끝내 사양하면서,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공도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춘추공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참으로 세상을 다스릴 만한 뛰어난 인재라 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마침내 춘추를 왕으로 섬기고자 하였는데, 그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2년(서기 655년) 정월에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삼았다. 이 때 고구려가 백제, 말갈 등과 합세하여 북쪽에 있는 33성을 침범하여 빼앗았다. 왕은 급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당나라는 3월에 영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에게 군사를 지휘하여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10월에 왕은 공주 지조를 대각찬(대각간) 김유신에게 시집 보냈다.

4년(서기 657년) 7월에 일선군(선산)에 큰 홍수가 나서 3백여 명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또한 동쪽 토함산의 땅이 저절로 타더니 3년 만에 꺼졌고, 흥륜사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또한 북쪽의 큰 바위가 저절로 부서졌는데 마치 쌀알 같았다. 이것을 먹어 보니 마치 오래 된 쌀과 같았다고 한다.

5년(서기 658년) 3월에 왕은 하슬라(강릉)의 땅이 말갈과 접하고 있어 백성들이 언제나 편히 살지 못하므로 소경(작은 서울)을 파하여 주로 만들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6년(서기 659년) 4월에 백제가 빈번히 군사를 풀어 변경을 노략질하므로 왕은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8월에 아찬 진주를 병부령(국방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10월에 왕은 조정에 나와 앉아 있었으나, 당나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간 사신의 연락이 없어 근심하고 있었다. 이 때 죽은 신하인 장춘, 파랑과 같은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나더니,

"신이 비록 백골이 되었지만,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어제 당나라로 갔더니, 당나라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이끌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정벌하기로 한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너무 깊이 근심하고 계시므로 미리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왕은 크게 놀라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곧 장춘과 파랑의 두 집안 자손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관리에게 명해서 한산주에 장의사라는 절을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7년(서기 660년) 정월에 상대등 금강이 죽었으므로 이찬 김유신(金庾信)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당나라 고종은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신라 왕을 우이도행군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사를 성원하도록 하였다.

5월 26일, 왕은 김유신(金庾信), 진주(金眞珠), 천존(天存) 등과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을 출발하여 6월18일에 남천성(지금의 이천)에 도착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은 내주(지금의 중국 산동성)에서 출발하였는데 전선이 1천 리에 이어져 바다를 건너왔다.

6월21일에 왕은 태자 법민에게 전선 1백 척을 이끌고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나가서 소정방(蘇定方)을 맞게 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10일에 백제의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서 백제 의자왕의 도성(서울)을 함락시킬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법민은,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대장군이 도착하셨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소정방(蘇定方)은 크게 기뻐하면서 법민을 돌려보내며 신라의 군사를 모아 오게 하였다.

법민은 돌아와서 소정방(蘇定方)의 군세가 대단히 크고 강하다는 것을 알렸다.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태자에게 명하여 대장군 김유신(金庾信)과 장군 품일, 흠춘 등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나가서 당나라 군사를 돕게 하고 금돌성(지금의 상주)으로 행차하였다.

7월9일에 김유신(金庾信) 등은 황산벌로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곳에 진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그러나 네 번이나 싸웠지만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은 몹시 지쳐서 싸울 힘이 없었다.

장군 흠춘이 아들 반굴에게 말하였다.

"신하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며, 자식 노릇을 다하기 위해서는 효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냐? 이런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목숨을 내던진다면 충과 효를 함께 실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삼가 아버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반굴은 말을 마치자, 곧 적진으로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러자 좌장군 품일도 아들 관창(관상이라고도 함)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 여섯 살이다. 그러나 의지가 굳고 용감하다. 너는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모든 장병들의 모범이 되겠느냐?"

"예!"

관창은 큰 소리로 대답한 다음 갑옷을 입고 한 자루 창을 비껴 잡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관창은 적에게 사로잡혀 백제의 장군 계백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은 군사를 시켜 관창의 갑옷을 벗겨 보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면서도 용감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신라는 이길 수 없겠구나. 소년도 이처럼 용감한데 하물며 장사들이야 얼마나 더 용감하겠느냐!"

하고는 관창을 살려 보냈다. 관창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소자가 적진으로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도 못하고 적의 깃발을 빼앗아 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한 때문이 아닙니다."

관창은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신 후 다시 적진으로 달려가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다시 계백에게 사로잡히게 되니, 계백은 그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돌려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에 옷깃을 적시면서,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을 때와 같구나. 참으로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다행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이 광경을 본 신라군은 모두 감격하여 죽음을 각오했다. 군사들이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돌격하니, 백제군은 크게 무너져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과 상영 등 30여 명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만나기로 한 7월9일, 소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지금의 장항)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를 만나자, 이를 크게 무찌르면서 쳐들어갔다.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사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김유신(金庾信)이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독군(장군)인 김문영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유신(金庾信)은 크게 화를 내면서,
"대장군은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못하고 오직 기일에 늦었다는 것만으로 죄를 따지려고 하는가? 나는 죄없이 모욕을 받을 수는 없다. 만약 죄를 주겠다면 먼저 당나라 군사와 싸움을 끝낸 후에 백제를 칠 것이다."

하고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는 군문에서 도끼를 치켜드니, 노한 그의 머리털은 꼿꼿하게 일어서고 허리에 찬 보검은 칼집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자 소정방의 우장군인 동보량이 다급하여 발을 구르면서,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변할 것 같습니다."

하고 고함을 쳤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더 이상 김문영의 죄를 묻지 않게 되었다. 이 때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에게 편지를 주어 당나라 장군에게 보내면서 제발 군사를 물러가게 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7월12일,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합세하여 의자왕이 있는 백제의 도성으로 쳐들어가서 성을 포위하기 위해 소부리(부여) 벌판으로 진격하였다.

거기서 소정방은 두려워하며 더 이상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신이 소정방을 잘 달래서 두 나라 군사가 합심하여 네 길로 나누어 쳐들어갔다.

백제 왕자는 상좌평을 시켜 많은 음식을 만들어 보냈지만 소정방은 거절하였다. 그러자 의자왕의 서자인 궁이 좌평 6명과 함께 나와서 사죄를 하였으나 이것도 물리쳤다.

7월13일에 의자왕은 가까운 신하들을 거느리고 밤에 웅진성(공주)으로 도망치고, 의자왕의 아들 융은 대좌평(오늘날의 수상)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이 때 법민은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지난날 너의 아비는 나의 누이동생을 참혹하게 죽여 옥중에 파묻어 놓아 2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오늘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다."

하였다. 그러나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7월18일에 의자왕은 태자와 웅진방의 군사들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부터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상주)에서 소부리성(부여) 으로 왔다. 그리고 제감(벼슬 이름) 천복을 당나라로 보내어 승전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8월2일에는 크게 잔치를 베풀고 모든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소정방, 그리고 장군들은 윗자리에 앉고, 백제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을 아랫자리에 앉게 하여,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였다.

그것을 본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이날 모척이란 자를 잡아 죽였다. 모척은 신라 사람인데 백제로 도망하여 대야성(합천)의 금일과 공모하여 성을 함락시켰으므로 죽인 것이다. 그리고 금일을 잡아 그의 죄를 꾸짖었다.

"네가 대야성에 있으면서 모척과 공모하여 백제의 군사를 몰래 끌어들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성 안의 양식을 태워 성을 지킬수 없게 한 것이 너의 첫 번째 죄이다. 그리고 품석 내외를 죽이게 한 것이 두 번째 죄이며, 백제 사람들과 함께 제 나라를 침공한 것이 세 번째 죄이다."

그리고 그의 사지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 왕이 항복했음에도 남장, 정현 등의 성에 있는 백제군은 항복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 지수신도 홀로 임존성(충남 대흥)을 지키며 항복을 거부했고,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청량군)에 진을 치고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소정방이 임존성을 공격하였으나, 지형이 험하여 이기지 못하였다.

9월3일, 당나라 낭장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부여)에 주둔하였다. 신라 왕자 인태도 사찬 일원, 급찬 길나와 함께 군사 7천여 명을 거느리고 유인원과 함께 사비성에 머물렀다.

한편 소정방은 백제 왕과 왕족, 그리고 신하 등 93명과 백성 1만2천 명을 거느리고 사비(백마성)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 대나마 중지 등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갔다.

9월23일,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에 들어와서 항복한 백제 사람들을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 유수 유인원은 신라군과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격파하여 쫒았다. 적들은 사비성 남령(부여 금성산)으로 물러가서, 성채 4,5개를 세워 진을 치고 기회를 엿보면서 각 성읍을 돌아 다니며 약탈을 하였다.

그러자 백제 사람들 중에 20여 성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과 한패가 되었다. 당나라 황제는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9월28일에 왕문도가 삼년산성(보은)으로 와서 왕(무열왕)에게 조서를 전달하게 되었다. 이 때 왕문도는 동쪽을 향해 서고 왕은 서쪽을 향해 서서 황제의 선물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황제의 명령을 전달한 왕문도가 선물을 주려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으니, 그의 수행원이 대리하여 일을 끝마쳤다.

10월9일에 왕은 태자와 모든 장병을 거느리고 이례성(지금의 논산)을 공격하였다. 10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더니, 반란을 일으켰던 백제의 20여 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10월30일에는 사비성 남쪽의 성채를 공격하여 1천5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1일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칠중성(적성)을 침공하여 군주 필부가 전사하였다.

11월5일에 왕은 계탄(부여강)을 건너서 왕흥사 잠성(부여군 울성산성)을 공격하였다. 7일에 적을 무찌르고, 7백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11월22일에는 왕이 백제로 부터 돌아와서 전공에 따라 상을 주었다. 계금졸 선복을 급찬으로 삼았고,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는데, 그들은 모두 전사한 사람들이다.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4명에게는 관직을 주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또한,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에 따라 벼슬을 주니, 좌평으로 있던 충상, 상영,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벼슬을 주어 총관으로 삼고, 은송(벼슬) 무수에게는 대내마의 직위를 주어 제감으로 삼았다.

8년(서기 661년) 2월에 백제의 부흥군이 사비성을 침공하여 왔다. 왕은 이찬 품일을 대장군으로 삼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등으로 돕게 하였다. 또한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여 아찬 진왕으로 하여금 돕게하고,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으로, 무훌, 욱천 등을 남천 대감으로, 문품을 서당 장군, 의당을 남당 장군에 각각 임명하여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3월5일경, 사비성 중간 지점에 이르게 되자, 품일은 군사를 나누어 먼저 떠나 두양윤성의 남쪽에 가서 진영 설치할 곳을 살폈다. 이 때 백제 사람들은 신라군이 미처 진영을 설치하지 못한 것을 보고 갑자기 뛰쳐나와 공격하였다. 신라군은 불의의 습격을 받고 크게 패하여 도망하였다.

12일에 신라의 대군은 고사비성 밖에 진을 쳤다가 두양윤성을 공격하였지만,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4월19일에는 할 수 없이 군사를 돌아오게 하였다. 대당과 서당을 먼저 보내고 하주군은 뒤를 따르게 하여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군을 만나 서로 싸웠지만 패하여 물러났다. 이 싸움에서 죽은 사람은 적었지만, 병기구와 많은 군량을 빼앗겼다.

그러나 상주 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나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마침내 백제 진영으로 쳐들어가서 2천여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한편, 왕은 군사들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근심하여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등을 보내어 지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가시혜진에 이르러 군사들이 가소천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장군들에게 벌을 주었다.

5월9일(혹은 11일이라고도 함)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연합하여 술산성(경기도 여주)으로 공격하여 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적군은 북한산성으로 이동하여 포차(돌멩이를 장전하였다가 발사하게 되어있는 무기)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 성루를 파괴하였다.

그러자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사람들을 시켜 철질려(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펴 놓으니,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였다. 그리고 안양사(절 이름)의 창고를 헐어 그 재목으로 성의 허물어진 곳을 수리하여, 누대를 만들고 굵은 밧줄로 얽어 매었다.

또한 소와 말의 가죽과 무명옷을 걸어 매어 그 안에 활과 포를 설치하고 굳게 지켰다. 이 때 성 안에는 남녀 2천8백 명이 있을 뿐이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소년과 노인들까지 격려하여 강한 적을 막으면서 20여 일을 싸웠다.

그러나 군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지성껏 하늘에 빌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진으로 떨어지고,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졌다. 그러자 적은 크게 놀라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크게 기뻐하여 동타천을 대내마의 벼슬로 올려 주었다. 이 때 압독주(경산)를 대야(합천)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처럼 붉게 변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나오니 너비가 다섯 걸음이나 되었다. 마침내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nssillak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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