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인종(1122-1146)

자 인표(仁表). 휘(諱) 해(楷). 예종의 맏아들. 어머니 순덕왕후(順德王后).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제3녀 폐비(廢妃) 이씨와 제4녀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예(金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

1115년(예종 10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122년 15세의 나이로 이자겸에게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 등을 시켜 반란을 평정하고 이자겸을 귀양보냈으며, 그의 딸들인 왕비들을 폐출(廢出)하였다.

1129년(인종 7년)에는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였다. 한편 금(金)·송(宋)나라 등과 사신 왕래를 자주 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서경(西京)에서 묘청(妙淸)이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金富軾)을 서경 정토대장(征討大將)으로 삼아 이를 평정하였다.

1145년(인종 23년)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의 장릉(長陵)이다.

【이자겸의 난, 인종4년(1126)】

고려 인종 때의 문신(李資謙 ~1126). 예종 3년(1108년)에 둘째 딸이 예종의 왕비가 되어 소성군 개국백에 봉해졌다.

1122년에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예종의 왕제들을 물리치고, 어린 태자(뒤의 인종)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양절익명 공신이 되어, 권세를 한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자기의 셋째와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삼게 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했고, 벼슬자리를 팔아 돈을 모으는 등 부정한 짓을 일삼았다.

인종 4년(1126년)에 상장군 최탁 등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오히려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뒤에 척준경에게 붙잡혀 영광으로 귀양가 있다가 죽었다. 이 사건을 '이자겸의 난'이라 한다.

【묘청의 난 妙淸之亂, 인종13년(1135)】

고려 인종 때(1135년) 묘청이 일으킨 난. 당시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한 데다 밖으로는 새로 일어난 금나라가 고려에 압력을 가해와 사회가 크게 불안하였다.

이에 서경 출신 귀족들은 개경파 귀족을 몰아 내고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자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 보수적인 개경파 귀족들이 이에 적극 반대하므로,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여 천견충의군 (天遣 忠義軍)을 조직,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의 무리는 한때 자비령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김부식의 토벌로 1년 만에 진압되고 묘청 자신은 부하 조광(趙匡)에게 피살되어 개경에 효시되었다. 이 난이 있은 뒤 고려 지배층의 보수화가 더욱 심해져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인종23년(1145)】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1145년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진삼국사기표〉에는 “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 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신하·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편찬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구성은 크게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졌다.

본기 신라 12권(신라 5, 통일신라 7),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신라에 그렇게 편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천재지변·전쟁·외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부문은 축성(築城)과 순행(巡幸), 관제 정비와 인사 이동,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라는 종교 관례 등이 서술되어, 당시 삼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축성은 백제가 가장 많아 늘 전쟁을 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순행은 1·2월에 많이 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수렵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신라는 구휼과 권농 및 수렵 등 다양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인사 이동은 신라에서 가장 빈번하였으며, 종교 관례는 백제에서 많이 하였다. 천재지변 부문은 혜성·유성·일식·가뭄·홍수 등 600여 회의 천재와, 지진· 화재 등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주로 정치적 사건을 예언하는 기능을 하였다.

전쟁 부문은 전체 440여 회의 전쟁이 발생하는데 대체로 고구려는 이민족, 백제는 신라와 전쟁하였다. 외교 부문은 620여 회의 교섭기록이 있는데 주로 조공(朝貢)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외교가 많았다. 물론 삼국은 독립국가로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며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연표 상·중·하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이 소략하다.

상(上)은 BC 57년(박혁거세 즉위)부터 274년(미추왕 13),
중(中)은 275년(미추왕 14)부터 608년(진평왕 30),
하(下)는 608년(진평왕 30)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멸망한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의 멸망까지 기록되어 있다.


제1권은 제사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3~5권은 신라 지리,
제6권은 고구려·백제 지리,
제7~9권은 직관(職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지리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통일 뒤에 넓혀진 영토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사지는 5묘(廟)·3사(祀)에 대한 설명이 많이 차지하고 있고,
악지는 악기·가악(歌樂)·무(舞)·악공,
직관지는 중앙관부·궁정관부·무관과 외직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열전 기전체의 역사서로서는 열전이 빈약한 편이다. 전체 69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특별히 항목을 분류하지는 않았다.

제1~3권은 김유신 열전이고,
제4권은 을지문덕·거칠부 등 8명의 열전,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등 10명의 열전,
제6권은 강수(强首)·최치원 등 학자들의 열전,
제7권은 관창(官昌)·계백(階伯) 등 순국열사 19명의 열전,
제8권은 솔거(率居)·도미(都彌) 등 11명의 열전,
제9권은 연개소문·창조리(創助利) 등 반신(叛臣)의 열전,
제10권은 궁예·견훤 등 역신(逆臣)의 열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어 왔던 것은 사론(史論)의 성격을 지닌 논찬(論贊)이다. 논찬은 신라본기 10개, 고구려본기 7개, 백제본기 6개, 열전 8개 등 모두 31개가 있다.

내용은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신채호 등이 비난한 것처럼 사대적인 악서(惡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편찬된 시기와도 관련된다.

즉 이 책은 고려 귀족문화가 최고로 발전하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런 시대는 대체로 전 시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때인데, 특히 당시에는 거란 및 여진과 전쟁한 뒤 강력한 국가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의식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편찬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전근대 역사서의 특징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성을 유지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고기]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 年代曆)] 및 김대문의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과 [삼국지] [후한서] [위서(魏書)]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히려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점은,

첫째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다섯째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잘 나타난다.

이 책은 1174년(명종 4)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초판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기 후반에 성암본(誠庵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일부만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1394년(태조 3)에 3차 간행, 1512년(중종 7)에 4차 간행이 있었다. 4차 간행은 현재 완질의 형태로 옥산서원과 이병익(李炳翼)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것이 있는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nsgoroek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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