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최초’에서 ‘빛나는 최고’로… 꿈은 이루어졌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이슬람식 이름인 '후세인'을 중간이름으로 가진 미국 대통령, '신의 은총'(버락)이라는 뜻의 아프리카식 별난 이름을 가진 미국 대통령, 미국 본토가 아닌 하와이에서 태어난 미국 대통령,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자카르타 골목을 누비면서 어린시절을 보낸 미국 대통령.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된 버락 오바마 당선인은 이처럼 '특이한 점'이 많은 미국 대통령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다양한 인종, 국적, 문화가 한 데 어우러진 오바마 당선인의 가족을 '미니 유엔'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성(姓) 알파벳인 'O' 'B' 'A' 'M' 'A' 다섯 글자를 키워드로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했다.


●Origin(뿌리…아버지 나라 케냐)

오바마 당선인은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자신의 뿌리를 '혼돈과 두려움의 시작'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정체성 혼란을 이 같이 말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케냐의 루오족 출신 흑인. 오바마 가문은 백인들에 의해 미국으로 끌려온 노예의 후손이 아니라 케냐에서 농민으로 살아온 집안이다.

1959년 하와이로 유학을 온 아버지는 백인 여성과 결혼해 오바마 당선인을 낳고 1963년 가족의 곁을 떠났다. 8년 뒤 어린 소년인 오바마 당선인과 재회했으나 곧 케냐로 돌아갔다.

오바마 당선인은 이후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큰 기대를 품고 1987년 처음으로 케냐를 방문하지만 아버지의 부끄러운 과거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특권층으로 살던 아버지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부끄러운 과거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케냐를 정신적 고향이자 뿌리로 여기게 됐다. 그러나 그는 1991년, 2006년 등 케냐를 세 차례 방문하며 뿌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Biracial(두 인종…흑백 결합)

오바마 당선인은 1961년 하와이에서 흑백 혼혈로 태어났다. 어머니 앤 더넘 씨는 케냐 정부와 미국 후원자의 도움으로 하와이대에서 공부하던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과 결혼해 오바마 당선인을 낳았다.

그는 본토와 달리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은 하와이에서 외조부모,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천진난만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저서에서도 어렸을 때 "아버지가 숯처럼 새까맣고 어머니가 우유처럼 새하얗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 조금도 아프게 새겨지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67년 오바마 당선인의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했다.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그는 처음에는 냉장고는 물론 수세식화장실도 없는 집에 살기도 했다. 돈이 부족해 국제학교 대신 현지학교에 다니면서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닭을 쫓아다니거나 물소를 피해 도망치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염려해 1971년 그를 하와이로 혼자 돌려보냈고 그는 외조부모의 지원을 받아 하와이의 명문 푸나호우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Adolescence(사춘기…좌절과 방황)

그는 하와이로 돌아온 뒤 한층 성숙해졌다. 사춘기가 시작됐고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흑인의 좌절을 맛보며 방황한다. 자신의 피부색이 어머니와 다르다는 사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된 맬컴 엑스 등 급진적 흑인 지도자들의 책을 탐독하며 정체성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오바마 당선인은 술과 담배에 탐닉하며 문제아로 10대를 보냈다.

그는 올해 8월 가장 큰 도덕적 실패를 묻는 질문에 "학창시절 마약에 손댄 것"이라며 후회하기도 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1980년 하와이를 떠나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탈 컬리지에 입학한 뒤에도 마약을 끊지 못했다. 피부색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낙오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흑백의 세계를 모두 인정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같은 고민을 떨쳐냈다. 그리고 오랜 방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Mainstream(주류 사회로…전환점)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것을 결심한 오바마 당선인은 1981년 뉴욕 컬럼비아대로 편입한다. 마약과 술을 끊고 공부에 전념하게 된 것도 이 때다.

그는 세계의 심장부 뉴욕에서 주류 사회를 접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컨설팅 회사에 취직해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틈틈이 뉴욕 할렘가와 뒷골목의 노숙자, 빈민층을 둘러보며 '지역사회 운동가'의 꿈을 키웠다.

1985년 오바마 당선인은 이 꿈을 이루고자 미래 정치적 본거지 겸 '제2의 고향'인 시카고로 옮긴다. 그는 흑인 밀집지역인 사우스사이드에서 거주환경 및 인권 개선 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 이상 활동했지만 기대치에 못 미치는 변화에 현실적 한계를 느꼈다. 이 때 자신의 역량을 더 길러 꿈을 효율적으로 이루겠다는 희망을 품고 1988년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흑인 최초로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에 당선되면서 언론에 화제의 인물로 보도되기도 했다.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성공한 법조인의 길이 보장된 엘리트였다. 그러나 오바마 당선인은 시카고의 빈민가로 돌아갔다. 그는 소외계층과 약자를 위한 민권변호사로서 자신의 배움을 실천하며 봉사활동에 열을 올렸다.


●American dream(꿈을 이루다…대통령 오바마)

오바마 당선인은 1996년 일리노이 주의회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이어 2004년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자금력과 명성을 내세운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당선됐다. 정치에 갓 입문해 헌금이나 조직적 뒷받침도 없었다. 그는 혼자 승용차를 몰아 유권자를 찾아다녔고 두세 명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호소해 승리했다.

초선 상원의원인 그가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오른 것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기조연설이었다.

그는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보수의 진보도, 진보의 미국도 없으며 오로지 미합중국만 있다"며 단합을 호소하는 명연설로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연방상원의원에 되기 전이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소신을 분명히 밝힌 것은 두고두고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200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만 해도 "너무 경험이 부족하다" "스타성은 인정되지만 대통령직 도전이 너무 성급했다"는 회의가 많았다.

그러나 인터넷과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젊은층의 변화욕구를 섬세하게 잡아낸 치밀한 선거전략, 청중을 움직이는 탁월한 연설능력 등을 무기로 아무도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꿈'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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