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족(豪族)
  
▶ 호족이란?

호족이란 대토지를 소유한 자를 호족(豪族)이라고 하였는데, 이 호족(豪族)으로 인해 후한 말 농민들의 몰락을 가져왔고 후한의 경제는 도탄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지방에 거주하던 세력가로 그들을 중앙 정부의 지지 세력으로 흡수하는 일이 그 나라의 중요한 국가 정책이었다. 혼인 정책을 통해 그들은 왕실의 친척이 되기도 하였으며,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 그들은 반독립적으로 지방을 할거하기도 하였는데, 한나라 멸망 과정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한대는 리(里)를 기본으로 사회 구조를 형성하였으며, 처음엔 서로 격차가 없어서 리(里)는 농민들이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점차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가하자 농민생활에 심한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고 이로 인하여 부농민이 지방호족(豪族)으로 성장하게 된다.

호족(豪族)의 호칭에는 호성, 호종, 호강, 호우, 호건, 대성 등이 있으며, 이들은 상업에도 진출하여 대상인이 되기도 하였다. 후한 말 이들 호족(豪族)들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하여 정치계로 진출하였으며, 일부는 고위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삼국을 이끌 지배계층으로 성장한다.

호족(豪族)의 구성.

호족(豪族)은 가(家)를 기본 단위가 모여 이루어 졌다. 이들 가(家)에는 부유한 가(家)도 있고 그렇지 않은 가(家)도 있었는데, 이들 각양각색의 구성원들이 유력한 가(家)를 중심으로 혈연적으로 사회적으로 결합하여 지방세력을 형성하였다. 이 유력한 가(家)를 보통 명가(名家)라고 부른다. 호족들은 토지신 및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매월별로 제사가 이루어졌다. 조상신에 대한 제사는 정월에 가족 전원이 참가하는 대제(大祭), 2월의 대사(大社), 5월의 하지일(夏至日) 등이 있었다.

호족들은 매년 년초에 동족인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때 단순히 서로의 문안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동족들의 구제를 의논했다. 예로 3월에는 동족 중 가난한 자에게 식량을 주었고, 9월에는 동족 중 고아나 과부, 병약자들에 대해 구제를 논의하였다.

호족(豪族)의 농업경영.

호족(豪族)의 농업경영은 각기 가(家)에서 개별적으로 경영하였다. 호족(豪族)들이 직접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보통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豪族)은 노비를 시켜 대신 경영하게 하였으며,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받고 땅을 빌려 주기도 하였다.

유력한 가(家)는 명가(名家)라하여 호족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 밑에는 노비와 소작농, 빈객(貧客) 등이 있었다. 노비와 소작농은 호족의 경제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빈객(貧客)(일명 협객들로 구성된 장수)을 이용하여 호족은 자신의 영지를 확장시켜 나갔다.

호족의 주 수입은 소작농과 노비를 이용한 농업에 있었으나, 대상인이 된 호족들도 있어 상품 판매 행위로 수입을 얻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호족들은 농업과 상업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나 이들을 구입하고 소작농을 하는 농민들의 생활은 나날이 빈곤해져 갔다.

호족(豪族)과 농민과의 관계.

호족(豪族)들이 대토지를 소유하자 소농민들은 농작물을 경작할 땅을 호족(豪族)에게 소작료를 주고 빌려야 했다. 호족(豪族)들의 상품매매로 인해 일상용품까지 호족(豪族)에게 구입을 해야 했으며, 소작료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비까지 호족에게 갖다 받쳐야 했다. 이로 인해 소작농들은 빈곤한 생활을 했으며, 호족(豪族)과 소농민들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호족(豪族)의 폭압을 견디지 못한 많은 농민들은 삶의 터전인 고향을 버리고 방랑하거나 도적이 되어 호족(豪族)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각 호족(豪族)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빈객(貧客)이라는 협객무리를 받아들였다. 병력까지 소유한 호족(豪族)들은 독자적인 자기 세력을 구축하여 후한 말 각 제후들로 성장하게 된다.

%빈객(貧客)은 후에 삼국지에 등장하는 많은 장수들이 되었다.

호족(豪族)들의 대토지 소유의 결과.

소규모 농민들은 정부의 폭정과 폭압으로 가족을 양육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또한 홍수와 가뭄으로 곡식의 생산량이 급감하자 소규모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사채업자나 호족에게 팔아 버려 스스로 호족의 노비로 전락하는 <투탁노비>의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다. 농민의 감소는 세금의 감소로 이어저 나라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까지 도달하게 된다. 정부에서 이를 혁파하기 위해 토지소유를 제한한 <한전법> 등 각종 제도를 실행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무산되고 호족의 대토지는 점점 일반화 되어 같다. 이렇게 호족이 대토지를 점유하자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으며, 후한 말 황건난과 같은 민란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호족의 성장의 배경3론(背景三論)

< 한대의 호족(漢代之豪族)이 제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

1. 중앙의 부족한 강제적 탄압.

-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는 호족 견제법(豪族 牽制法)을 펼쳤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나라에 있어 불필요한 정책이었다. 거기다 호족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았고 먼저 나서서 반발했다. 아직 호족의 힘이 필요한 광무제로서는 당연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 후로 호족 견제법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패기 있는 광무제가 그들에게 강압적인 요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광무제는 자주 호족들을 달래고 어르고 하였으나 도통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의 광종처럼 실행했다면 좋았겠으나 고려와 한이라는 호족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우선 첫째로 그 넓은 땅 크기라는 것과 한 대의 호족이 가지고 있는 노동력(즉, 사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의 어마한 수, 그리고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로운 점 등 이 바로 그것이었다.

광무제 별전(別傳)에도 그는 자주 황후와 함께 호족의 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도 쓰여 있으며 별 다른 대응책은 얻질 못했다고 한다.

2. 철(鐵)은 곧 호족의 힘을 상징.

- 전한(前漢)은 초와의 치열한 전쟁 후 세워진 나라였고 후한 역시 신(新)나라의 왕망(王莽)과 와 유현과의 치열한 전투로 하여금 그 끝을 보고 나라를 세웠다. 즉,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 무기가 될 철이 비약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1, 2차 대전으로 급속히 발달한 비행기가 그 예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전쟁에 썼던 철기구들은 당연 농업에 쓰여지기 마련이다. 철제농기구(그 대표적 예가 우경(牛耕)이라는 기구)가 중원 전체로 퍼져 나아가며 생산력을 급증한다. 그럼 당연 그런 소작농을 가지고 있는 호족이 더욱 배가 불려지고 부가 커지는 것이다. 거기다 철제농기구의 발달로 인하여 전한의 대전법(代田法), 후한의 구종법(區種法) 등의 농경기술의 개발도 진척되었으니 당연 호족은 그 세가 그 지방을 유린(蹂躪) 할 정도가 됨은 당연했다.

그래서 철은 곧 생산을 뜻했고 자연히 철과 노동력이 많은 호족은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3. 상업(商業)의 비약적 발전은 호족의 밑거름.

- 수공업은 상업의 밑천으로 전국시대에 많이 발달한 종업이었다. 그러다가 후한시대에 와서 그 과도기를 맞이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상공업이 발달하고 동시에 화폐가 자주 통행되었다. 당연 호족은 더욱 세입을 늘릴 수 있었고 그 세는 더욱 불어남이었다.

거기다 후한은 염업(鹽業:소금을 만드는 일)을 일부 허락했는데 이것은 상인에게 엄청난 이득을 남겨주었다. 그래서 명대(明代)에 들어서는 염업을 금지했고 황실에게 담당할 정도였으니 그 규모와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다. 또한 후한서에 나와 있는 후한의 직위 중 구경(九卿)의 대사농(大司農)이 있다는 것은 농업을 황실 자체에서 크게 관장하고 관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의미했다.

전국시대의 화폐에 이어 무제(武帝) 때의 오수전(五銖錢)이 널리 이용되면서 상업은 점차 발전되었다.

또한 점포가 유행했고 대상인, 상려(商旅:조선시대의 공인과 비슷)가 생겨났다. 그것들은 모두다 상업의 발달에 부채질을 하는 것들이었다. 거기다 외국무역 까지 발달하니 항구를 점한 호족들은 그 세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고 거기다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날 거리에 위치했으니 마음놓고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예를 들어보자면 전한의 6대 황제 경제(景帝)는 추은의 영(推恩之令:조조가 한 것으로 일종의 왕을 견제하는 방법)을 내려 오(吳), 초(楚), 조(趙) 나라의 영토 삭감을 도모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세력이 너무 방대해져 내린 결론이었다. 특히 오국의 염업은 그 규모가 전한의 8분지 1을 차지하였을 정도였고 조나라는 철제산업을 크게 일으켰다.

당연 자신들이 손해니 그들은 반란을 했고 경제는 그들을 회유(回遊:조조를 처형시키는 것으로 반란을 막음)하여 무마시켰다.

이렇듯 여러 이유가 있었고 호족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방출할 기회를 엿보다 후한 말년, 황건적의 난을 통하여 세를 잡은 것이다.

호족의 발전은 한나라의 발전을 의미했지만 너무 과하여 일어났으며 중앙의 비약으로 인하여 생긴 일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글쓴이: 삼국지넷 희희낙락)


소설 三國演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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