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처세술] '구현령(求賢令)'과 '술지령(述志令)'

마음에 꼭 드는 인물은 결점이 있어도 등용하라.  

그 무렵, 유비는 호복성의 군벌인 유표의 식객이 되어, 형주에서 심심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주인 유표는 유비를 극진하게 대접해 주고 있었지만, 여하튼 식객의 신세라서 할 일이 없었다. 북방의 효웅인 조조는 화북의 평정과 오환을 정복하기에 바쁘고, 강남의 패자인 손권도 오나라를 건국하는 일에 힘이 겨웠다. 때문에 위나라와 오나라의 완충지대인 장강의 중류지역에는 평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헤아려 보니, 유비가 형주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지났고 그 전에 원소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시기를 합치면, 칼을 들고서 말을 타고 싸움터를 달릴 기회가 오랫동안 없었던 셈이 된다. 덕분에 유비의 허벅지에도 군살이 붙고 말았다.  

'아, 이래가지고는 몸이 무디어지고 말겠다. 전쟁터에서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유비는 개탄하고 있었다. 이것이 '비육지탄'이라는 고사성어의 어원이다. 현재는 전쟁터와 관계없이 자신의 힘을 내보일 기회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건안 15년(210), 조조는 역사상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발표하였다. '구현령'이란 인재등용의 성명서이다. 조조는 이 속에서,  

'천하의 인재는 위정자가 적극적으로 찾아내지 않으면 그리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는, 청렴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든가, 충성심이 증명되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신분이 낮아서 못 쓴다든가... 등등의 조건을 붙여서는 안된다. 마음에 드는 인물이 있으면 다소의 결점이 있더라도, 또 자신의 취향에 맞는 타입이 아니더라도, 여하튼 등용하고 볼 일이다. 그 능력에 따라서 부하를 쓸 수 있는지의 여부가 지도자로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조조는 철저한 인재등용주의, 적재적소주의로 사람을 잘 가려서 썼다.  

조조가 신뢰하는 부하로 '곽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뇌가 영민한 사람으로, 여포와의 대결에 있어서, 오환을 정벌하는 데에 있어서, 그는 정확한 판단과 냉철한 전략으로 조조를 도왔으며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 조조는,  

"나의 대업을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곽가뿐이다."  

라고 하면서, 소중히 대하였다. 그런데 이 곽가라는 수완가는 여자에 대한 버릇이 나빠 늘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조의 측근에 진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어서, 곽가가 추문을 일으키면 그것을 회의석상에서 비판하였다. 그런데 곽가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 자리는 천하 국가의 대사를 토의하는 장소이다. 그런 사적인 문제를 거론할 곳이 아니오."  

라고 도리어 정색을 하고 나서는 판이었다. 이럴 때 조조는 쓴웃음을 지었을 뿐, 곽가를 책망하지는 않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결점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소용이 있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진군의 성실한 성격도 높이 평가하였다.  

곽가는 오환을 정벌한 후에, 지나치게 주색을 탐했던 탓인지, 38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훗날, 적벽에서 일패도지(一敗塗地)를 했을 때, 조조는,  

"곽가가 살아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패하지는 않았을 것을..."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당신은 자를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조조는 마음에 드는 인재는 매우 후대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정해진 원칙이 있다. 그것은 상대편에게 이용 가치가 있을 동안에만 후대한다는 것이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아, 얻을 것이 있을 동안은 좋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지든가, 혹은 사용자에게 있어서 도리어 지장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지금까지의 공적을 무시하고 거리낌 없이 잘라 버렸다. '왕좌지재'라고까지 칭송되었던 선비인 순욱이 원소의 곁을 떠나 조조에게로 달려갔을 때 조조는 손수 진영의 문까지 마중을 나와 손을 잡으며,  

"당신같은 우수한 참모는 내게 있어서, 옛날 자방(子房 유방의 공신 장량)과 같은 존재이다."  

라며 기뻐하였다. 과연 순욱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조조를 보필하여 관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출사하여 10여 년, 순욱은 최고로 우수한 참모로서 조조를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런데 훗 날, 한나라 왕실에 대한 정책에서 순욱은 주군과 대립하였다. 진실한 근황주의의 지사였던 순욱은 조조가 황후를 살해하였을 때,  

"신하로서의 충절을 견지하여, 황실에도 그에 상응하는 경의를 표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한 폭거를 하면 반드시 역신이라고 비난당할 것입니다."  

라고 간절히 진언하였다.  

'이제 이 사람은 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조조는, 순욱을 자살로 몰아넣었다.  

'건안의 칠자(七子)' 가운데 한 사람인 공융인 공자의 20대 손으로, 당대 제일의 유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건안 원년(196년), 조조가 헌제를 받들어 허(許)로 도읍을 옮겼을 때, 공융은 조조에게로 불리워 가서 의전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조정의 회의에 있어서는, 항상 올바른 말을 하여 황실과 정승과의 관계를 잘 조화시켰으며, 조조의 학문적 조언자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이 위대한 유학자도 결국은 조조가 왕위 찬탈의 뜻을 실행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건안 13년, 공융은 조조의 명령에 의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조조에게 이용당할대로 이용당한 공신이, 마지막에 버림을 받든가, 죽음을 당한 예가 적지 않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도 본심과 겉치레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문을 내세우는 한편, 실리를 얻을 수 있는가

'술지령'은 조조가 자신의 충성심을 천하에 선양한 문장이다. 그는 그 문장 속에서, 조씨 가문은 대대로 한나라 왕조를 섬겨온 충신으로, 황실에 충성함을 가훈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조조에게 있어서는 한나라 황실에 충절을 다하는 것만이 삶의 보람이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왕위를 찬탈한다는 마음은 있을 수 없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중국의 우스갯소리에, '이 땅에 은 20냥 없슴'이라는 것이 있다.  

머리가 조금 모자라는 사나이가 마당 한 구석에 은 20냥을 숨겨 놓고 도난을 당할까봐 걱정이 되어 '이곳에는 은 20냥을 파묻지 않았습니다.'라는 팻말을 세워 놓았다. 이렇게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조조의 '술지령'은 바로 이 우스갯 소리의 유래가 된 것이다. 중원에서 정권 다툼을 벌여 성공한 뒤, 50세가 훨씬 넘은 조조는,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천명이란, '조씨 가문을 왕실로 만든다.'라는 것이었다. 헌제는 이미 완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사실상의 지배자인 조조가 황제의 제위를 빼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거기서 조조는 본심을 숨기기 위해 이 '술지령'을 발표하고 더불어 제위 찬탈의 사전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조조는,  

"충근 근황이 나의 신조이다. 절대로 황제는 되지 않는다."  

라고 명백히 밝혔다. 역사는 확실히 그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 대신에 조조는 그의 아들인 조비를 선양의 형식으로써 황제로 만들기 위해 손을 썼다. 본질적으로는 역적인 신하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충근 근황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여기에 책략가로서의 본래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건안 19년(214), 황후 복씨는 조조에게 반역의 뜻이 있음을 알고 노하여, 친정 식구들과 조조를 죽일 모의를 꾸몄다. 그러나, 궁정의 안팎은 모두 조조 측의 비밀 경찰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 행동은 즉시 조조에게 알려졌다. 노발대발한 조조는 황후의 부친인 복완을 비롯한 일족의 무리들을 죽이고, 몸소 궁전으로 뛰어들어 숨어 있던 황후 복씨를 끌어내었다. 너무나 방약무인한 행동에 헌제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대성통곡을 하였으나, 조조는 들은 척도 않고 황후를 감옥에 처넣고 말았다. 보름 후, 조조는 황후 복씨를 죽이고 자신의 둘째 딸을 헌제에게 강요하여 새로운 황후로 맞이하도록 하였다.  

'구현령'과 '술지령'은 문장은 당당하고 휴률하지만 겉치레에 불과하며 조조의 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동서 고금을 불문하고 겉치레와 본심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위정자의 상투 수단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조만큼 냉철하고 비정하게 나누어 쓸 수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조조는 고금의 대 정치가였던 셈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세술을 삼국지의 조조, 손권, 유비를 통해 알아본다. 여기에 잇는 자료는 "삼국지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松本一男 지음, 이주영 옮김, 이목출판, 1995년 12월 10일 초판발행, 6,000원)" 에 나오는 자료로서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한권 구입하여 자기의 가까운 곳에 놓아 두고 자주 읽어 봄으로써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세술을 익히기 바랍니다.>


소설 三國演義
第001 - 019回 桃園結義, 除董卓, 三讓徐州, 斬呂布
第020 - 038回 煮酒論英雄, 千里走單騎, 滅袁紹, 三顧茅廬
第039 - 059回 長板坡, 赤壁之戰, 三氣周瑜, 戰馬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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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081 - 105回 彝陵之戰, 七擒孟獲, 六出祁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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