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처세술] 오나라의 멸망  

준마도 늙으면 둔한 말만 못하다  

한나라의 유향이라는 학자가 편찬한 역사책으로 <전국책 戰國策>이 있다. 전국시대의 주, 진, 제, 초 등, 12개국의 역사를 나라 별로 나누어서 저술한 것이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신하가 임금의 권위를 빌어, 다른 뭇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을 이름)'라든가, '사족(蛇足)'등의 유명한 고사성어도 있으며,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예전부터 많이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그 가운데의 <제책(齊策)> 에 '아무리 날랜 말도 늙으면 둔한 말만도 못하다'라는 격언이 있다. 어떠한 영웅 준재도 늙어지면 보통 사람만도 못하다는 뜻이며, 현대식으로 말하면 '노해(老害)'를 훈계하는 말이다.  

수성의 명군이라고 불리우던 손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만년의 후계자 선정에서 이런 경향이 현저하였다. 오나라의 황태자로는 일찍이 손등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황태자는 적오 5년(242년)에 부친인 대제보다 앞서 요절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분규의 씨가 생겨났다.  

손등이 죽자 손권은 왕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인 손화를 태자로 지명하였다. 그때, 손화의 나이가 19세로 차기의 후계자로서 연령, 인품, 재능이 모두 그저 그런 정도의 왕자였다.  

사람이 늙으면 같은 자식이라도 나이가 어린 쪽이 귀여운 것인지, 손권은 손화의 동생이며 아직 어린 손패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권은 손패를 노왕으로 봉하고 황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부여하였다.  

기업도 마찬가지이지만, 차기 사장에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은 사원들의 최대 관심사이며, 사장의 의향에 대하여 유별나게 만감하다.  

'폐하는 패전하 쪽을 후계자로 삼고 싶은 모양이다.'라는 억측이 어느덧 퍼져 나갔다. 금새 신하들 사이에서 태자파와 노왕파가 생겼다. 양쪽의 파벌은 각자가 추대하는 왕자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서로 물고 늘어져, 비난과 중상모략, 간사하게 아부하며 따르는 무리들이 횡횡하였다. 그리고 서울인 건업에서는 어느 파벌의 편을 드느냐가, 중신들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양쪽 파벌의 싸움과 선전 활동은 더욱더 에스컬레이트하여, 이윽고 피의 항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노왕파는 줄곧 술책을 꾸며 태자의 실각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당성을 존중함으로써 분쟁의 씨를 없애라

그 무렵, 군의 제일인자인 육손은 대장군 겸, 정승으로서 형주에 주재하고 있었다. 양 파벌의 소문은 형주에 있는 육손의 귀에까지 다다랐다. 원래 군인으로 정치적인 항쟁에는 흥미가 없는 육손이었으나, 정승을 겸하고 있는 이상에는 조정 안의 분쟁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육손은 손권에게 상주하였다.  

"태자는 차기의 제왕이며, 국가 정통의 상징입니다. 한편 노왕은 일반적인 전하이며, 제위를 계승해야 할 지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자 전하와 노왕 전하의 처우에는 엄연한 차이를 두셔야 함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승인 육손의 누차에 걸친 상주에도 불구하고, 대제인 손권은 전혀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노왕파의 무리들이 육손을 배척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각하고 말 것이다.'하고 두려워진 노왕파는 육손의 죄상을 조작하여, 손권에게 상신하였다.  

예전의 손권이었더라면 그런 중상모략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것과, 때마침 병상에 있었으므로 판단력이 둔해지고 있었던 것일까. 형주로 칙사를 파견하여 육손을 꾸짖었다.  

너무나도 한심했던 나머지, 육손은 죽음으로써 주군에게 간언하였다. 향년 63세였다. 육손이 분한 죽음을 한 후, 손권은 그의 충성을 재인식하고 심한 자책감에 사로 잡혔다. 그러나 사후 약방문에 불과했다.  

적오 13년(250년), 손권은 병상에서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  

"피를 나눈 형제가 그렇게도 추하게 싸우다니 한심스럽다. 이대로 가다가는 원소의 전철을 밟게 되겠다."  

라고 깨달은 손권은 태자 화를 폐적하며, 노왕 패에게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일당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만년에 총애하던 첩 비인 번부인에게서 낳은 손량을 황태자로 지명하였다. 그때 손량의 나이는 불과 8세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손권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 나이 어린 태자를 남겨 두고, 손권은 안심하며 죽지도 못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손권이 세상을 떠난 후, 오나라에서는 세 사람의 황제가 계속되었으나, 모두가 범용하여 시조의 후계자로서는 너무나도 됨됨이가 시원치 않았다. 오나라 천기 4년(280년), 제 4대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는 진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이기도 한 두예장군이 이끄는 부대에게 건업을 내주고 포로가 되었다. 대제 손권이 황제로 즉위한 이래, 51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오나라는 여기서 멸망하고 말았다.  

만년의 손권에게 있어 가장 큰 실패는 후계자를 선정함에 있어, 올바르게 도(道)를 세워 관철하지 못했던 점에 있다. 이 점에서는 후계자 선정에서 망설이면서도 개인적인 정보다도 정통성을 중시하여,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던 세째 아들 조치가 아니라 장남인 조비를 세웠던 조조가, 일국의 톱으로서는 한 수 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세술을 삼국지의 조조, 손권, 유비를 통해 알아본다. 여기에 잇는 자료는 "삼국지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松本一男 지음, 이주영 옮김, 이목출판, 1995년 12월 10일 초판발행, 6,000원)" 에 나오는 자료로서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한권 구입하여 자기의 가까운 곳에 놓아 두고 자주 읽어 봄으로써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세술을 익히기 바랍니다.>


소설 三國演義
第001 - 019回 桃園結義, 除董卓, 三讓徐州, 斬呂布
第020 - 038回 煮酒論英雄, 千里走單騎, 滅袁紹, 三顧茅廬
第039 - 059回 長板坡, 赤壁之戰, 三氣周瑜, 戰馬超
第060 - 080回 入西川, 逍遙津, 取漢中, 失荊州, 魏蜀稱帝
第081 - 105回 彝陵之戰, 七擒孟獲, 六出祁山,
第106 - 120回 九伐中原, 破西蜀, 三分歸一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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