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손 - 장만영(張萬榮)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의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조차 없는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