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푸른 고래처럼 오시고
ㅡ물의 레퀴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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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맹
 
물 아래 가라앉은 저 배는 이제 물의 질료(質料)에 가깝게 되었나이다. 기억의 갑판에 들러붙어 있던 해초와 딱딱한 껍질의 슬픔도 물의 형상(形相)에 거의 가깝게 투명해져있나이다. 천천히 헤엄치는 푸른 물고기보다 더 느리게 태양의 기둥들이 흔들리며 수면에서 가끔씩 발을 내리나, 허나 이제 그 발길이 더 무슨 위로가 되겠나이까? 물은 빛의 영토가 아니고, 빛은 희망의 영토가 아니어서,
 
그러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얼굴을 흔들리는 수면(水面)처럼 알지 못하니,
우리가 보고 있는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아니고
우리 앞의 당신은 지금 여기의 당신이 아니어서
당신을 흐릿한 수면(水面)처럼 밖에 알지 못하니
 
하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오지 않은 과거에서도 오고
이미 온 미래에서도 푸른 고래처럼 오는 그대여,
당신의 뜻대로 하시되
들리는 모든 소리를 당신의 목소리로만 헤아리는
물 아래 가라앉은 배와 그 속에 잠든
그 그리운 이름들을 기억하고 불러 주소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
다만 우리를 우리 죄로 심판받은 표식이라 하지 마시고
저들을 물로 심판받아야 할 불의 자식이라 하지 마시어
우리를 물안개로 위로받는 섬으로 밀어 올려 주소서.
아 이 더듬거리는 노래를 당신에게 바치오니,
 
보소서, 물 아래 가라앉은 저 배는 이제 물의 노래에 가깝게 되었나이다. 기억의 갑판에 들러붙어 있던 해초와 딱딱한 망각의 막막함도 물의 물에 가깝게 둥글어지고 있나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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