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 - 보들레르에게 - 김동명(金東鳴)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찬 이슬에 붉는 꽃물에 젖은 당신의 가슴을
붉은 술과 푸른 아편(阿片)에 하염없이 웃고 있는 당신의 맘을
또 당신의 혼(魂)의 상흔(傷痕)에서 흘러내리는 모든 고운 노래를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의 나라를 믿습니다

회색(灰色)의 두꺼운 구름으로
해와 달과 별의 모든 보기 싫은 고혹(蠱惑)의 빛을 뒤덮어버리고

정향(定向)없이 휘날리는 낙엽(落葉)의 난무(亂舞) 밑에서
그윽한 정숙(靜淑)에 불꽃 높게 타는 강(强)한 리듬의
당신의 나라를.


마취(痲醉)와 비장(悲壯) 통열(痛悅)과 광희(狂喜)
침정(沈靜)과 냉소(冷笑) 환각(幻覺)과 독존(獨尊)의
당신의 나라

구름과 물결 백작(白灼)과 정향(精香)의
그리고도 오히려 극야(極夜)의 새벽빛이 출렁거리는 당신의 나라를
오 님이여! 나는 믿습니다.


님이여! 내 그리워하는 당신의 나라로
내 몸을 받읍소서

살 비린내 요란(搖亂)한 매혹(魅惑)의 봄도
시의(屍衣)에 분망(奔忙)하는 상가(喪家)집 같은 가을도
님 계신 나라에서야 볼 수 없겠지요


오직 눈 자라는 끝까지 높이 쌓인 흰눈과
굵다란 멜로디에 비장(悲壯)하게 흔들리는 현훈(眩暈)한 극광(極光)이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서는
백열(白熱)의 키스가 되며
사(死)의 위대(偉大)한 서곡(序曲)이 되며
푸른 웃음과 검은 눈물이 되며

생(生)과 사(死)로 씨와 날을 두어 짜내인 장미빛 방석이 되어
버림을 당한 곤비(困憊)한 혼(魂)들에 여윈 발자국을 지키고 있는
님의 나라로 오오 내 몸을 받읍소서.


살뜰한 님이여! 당신이 만약 내게 문(門)을 열어 주시면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는)

그리고 또 철회색(鐵灰色)의 두꺼운 구름으로
내 가슴을 덮어주실 것이면

나는 님의 번개 같은 노래에
낙엽(落葉)같이 춤추겠나이다.


정(情)다운 님이여! 당신이 만약 문(門)을 열어 주시면
(당신의 전당(殿堂)으로 들어가는)

그리고 또 당신의 가슴에서 타는 정향(精香)을
나로 하여금 만지게 할 것이면

나는 님의 바다 같은 한숨에
물고기같이 잠겨 버리겠나이다.


님이여! 오오 마왕(魔王)같은 님이여!

당신이 만약 내게 문(門)을 열어 주시면
(당신의 밀실(密室)로 들어가는)
그리고 또 북극(北極)의 오로라빛으로
내 몸을 쓰다듬어 줄 것이면

나는 님의 우렁찬 웃음소리에 기운내어
눈 높이 쌓인 곳에 내 무덤을 파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