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건 - 아라베스크

아라베스크
전 봉건 (1928-1988)

빛 
빛과 물의 거리
빛과 물의 모퉁이
구름이라고 하는
새라고 하는
그리고 당신이라고 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
오늘은 빛과 물 속을 지난다
오늘은 어느 길을 가도 너와 만난다
길은 모두 빛과 물의 길
빛과 물의 말
빛과 물인 너
어디선가 또하나의 꽃이 소리없이 열리며 
빛과 물을 휘저어놓는다.

(『전봉건 시 전집』 문학동네. 2008)

이 시는 봄이 시작되는 바로 지금의 시다. 겨울의 날카로워진 빛과 소리를 잃은 물이 따뜻함과 소리를 얻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는 계절. 빛과 물이 서로 만나 온 세상을 적시고 구름도 새도 사랑하는 이도 모두 그 빛과 물의 기쁨에 취해있다. 구름과 새와 사랑하는 사람은 빛을 얻어 나에게 보여지는 그 무엇이 되고 그 가시성은 물 속에서 굴절되면서 내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물질이 된다. 

어느 길을 가도 우리는 기쁨과 만난다. 늘 세상이 그런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길이 빛과 물처럼 순리대로 흐르고 빛과 물의 말을 나누고, 빛과 물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세상은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흰 꽃이, 붉은 꽃이, 노란 꽃이 그 빛과 물을 휘저으며 그걸 둥글게 말아 올리거나 직각으로 구부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봄은 아라베스크 문양처럼 빛과 물로서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봄에는, 잠시만이라도, 울음을 멈추고, 빛과 물인, 우리, 꽃처럼 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매일신문. 노태맹 시인 2015.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