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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생과 노태맹시인

노태맹 시인 - 1962년 경남 창녕 출생. 계명대 철학과, 영남대 의학과 졸업. 1990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 유리에 가서 불탄다(세계사, 1990), 푸른 염소를 부르다(만인사, 2008), 시인과의 만남(facebook)
추천 수 : 109 / 0
조회 수 : 7837
2004.10.06 (08:05:13)
풍장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 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이 시에서 죽음의 의례는 그것에 수반되게 마련인 심각함이나 비장함을 탈색한 채 매우 유머스러하게 그려지고 있다. 화자는 잠시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한 가벼운 마음가짐과 친근한 어조로 자신이 죽은 후 치러야할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는 살아 있을 때와 별 다름없는 복장을 하고 현대문명이 제공하는 교통편을 이용하여 죽음의 장정에 오른다.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로 입문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검색'으로 암시된 난관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은 풍장이란 제의적 죽음이 함유하고 있는 불온성, 즉 현실 순응형의 삶으로부터의 일탈, 금지의 위반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연작시집 풍장의 서두를 장식하는 죽음의 항해가 서쪽, 다시 말해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사자의 왕국은 대개 해가 저무는 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이 조락의 계절은 늦가을이란 사실과도 조응한다.)
뭍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선유도로 수평적 이동을 한 끝에 그는 드디어 목적지인 무인도에 도착한다. 일상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그 섬은 이 세계의 끝이자 다른 세계(피안)의 입구로서 그곳에서 풍장이란 육신의 해체 의식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그 섬은 사자의 안식처가 연상시키는 격리 고독의 의미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자 천상과 지상의 연결점이란 내포를 지니고 있다. 또한 바닷물과 모태의 양수와의 유비 관계는 섬을 일종의 우주적 자궁, 죽음과 재생이란 통과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게 만든다. 섬은 모태이자 무덤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가방 속에 다리 오그리고' 같은 구절은 태아 상태로의 회귀를 암시하고 있으며 화자의 시신을 실어 나르는 통통배 역시 태아를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요나적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배는 운송 수단인 배인 동시에 새 생명을 잉태한 여성의 배이기도 한 것이다. ('통통'이란 신명난 의성어에는 태아 시절 자궁에서 듣던 생명의 박동 소리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과연 그는 섬에 도착한 다음 가방과 옷, 구두와 양말, 손목시계 등 삶의 흔적을 차례로 제거당함으로써 이 세상에 태어날 당시의 원초적 무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옷과 신발을 벗는 것은 일종의 정화의식- 허물 벗기의 일종으로서 이를 통해 화자는 시원의 순수 상태로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나체화에 이어 살과 피를 말리는 본격적인 탈골 작업이 진행된다. 그는 가벼워지고 투명해져 바람이라는 질료와 어울리기에 이른다. 그는 바람을 덮고 바람을 여미고 마침내 바람과 노는 경지에 들어선다. 이처럼 풍장은 바람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육신의 기화라는 상승제의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고양되고 자유로워진 육신은 허공으로 한없이 확산하며 세계 속으로 합류해 들어간다. 탈물질화한 육신은 익은 열매에서 그 씨앗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세상 속에 자신의 존재를 퍼뜨린다. 그 씨앗은 백금 조각이란 연금술적 이미지와 맞물려 영적 시련과 고난 끝에 얻은 지고한 가치의 획득을 암시해 주고 있다. 씨앗이나 백금 조각 같은 작은 입자는 그 속에 전 우주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가 꿈꾸는 풍장은 전 세계가 참여하는 우주적 죽음이며 그는 죽음으로써 전 세계를 활성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화자의 죽음- 재탄생에 의해 세계 또한 젊어진 우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인의 풍장은 죽음에의 봉헌인 동시에 삶의 극대화란 모순된 청원을 동시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풍장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탈골 작업과 갑작스런 폭발 해체라는 상반된 요소를 함께 보유하고 있다. (풍장의 해설-시집 남진우)


풍장 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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