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길
오규원 (1941-2007)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시집 『두두』. 문학과 지성. 2008)

오규원 시인이 죽고 난 다음해 나온 유고 시집 『두두』는 엽서 만 한 그림들을 모아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반복되는 단순한 양식의 이미지들, 이를테면 돌과 바람과 새와 꽃 등은 이전처럼 시인이 포획한 이미지가 아니라 죽음을 앞 둔 시인이 앞으로의 거처로 보아둔 곳처럼 보인다. 죽기 열흘 전 겨울 병실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나는 지금 시인이 굴린 돌 하나를 들고 있다. 길과 나무와 바위는 엄숙한 세상의 규칙 같다. 그런데 어디선가 ‘굴러 내린 돌’이라는 우발성이 내 손 안에 있다. 대개 이 우발성은 우리에게 낯 선 아픔이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돌을 본다. 그런데, 만약 나 자체가 이 세상이라는 길 위로 ‘굴러 내린 돌’의 우발성이라면 어떨까? 세상이 나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지 않을까?

하지만 자꾸 비켜서고 물러서지 말았으면 좋겠다. 굴러 내리는 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우발적인 돌들은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돌들>(「봄날과 돌」)이기 때문이다.

노태맹 시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