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먼 길을 새라 부르다가
허만하(1932- )

아득한 지평선을 향하여 힘껏 팔매질한 돌이 떨어지기 직전 갑자기 몸을 뒤집어 날개를 펼치며 타오르는 홍시빛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몸짓을 새라 부르다가

조용히 퍼지는 종소리에 떠밀려 잠이 덜 깬 아침 하늘 환한 언저리에 제자리 걸음으로 간신히 떠 있는 한 무리 맑은 지저귐을 새라 부르다가

아득히 먼 별자리 바라보며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한 해 한 번 가슴 설레는 먼 길을 건너는 수천 마리 새떼의 부드럽고도 모진 날개 짓을 새라 부르다가, 부르다가

(전문.『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2002)

떨어지는 돌-노을 빛 몸짓, 
퍼지는 종소리-맑은 지저귐 소리,
반짝이는 별-수천의 새떼들. 

하늘 위에 표상된 이 짝지어진 이미지들은 ‘새’로 묶여지고 ‘부르다가’로 풀어진다. 물론 ‘새’를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새 일반’의 이미지들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연은 새를 새라고 부르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떨어지다가 다시 솟구쳐 오르는 새, 간신히 떠 있지만 맑게 지저귀는 새, 부드럽지만 모진 날개 짓을 하는 새는 삶에의 의지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득히 먼 길을 새라 부르는 것은 삶의 신산(辛酸)함과 허무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시인은 아득히 먼 길을 ‘향해 떠나는’ 것을 새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득히 먼 길 자체가 새라고 부른다. 새는 이상향을 품고 그 곳을 향해 날아가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아득히 먼 이 삶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현실적이고 운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시에서 너무 나갔다. 그저 이 시의 아련한 아름다움을 즐겨보자. 상투적일 수 있는 이 시를 살린 ‘부르다가, 부르다가’를 반복해 읽다가, 어쩌면 시인이 그랬을 것처럼 눈물이 난다. 이 아득히 먼 삶의 길이 어디론가 가는 새의 길이 될 수는 있을까? 새는 삶의 이 아득함을 하나하나 자신의 여정으로 끌고 갈 수는 있을까? 아, 새여, 부르다가, 부르다가.

(매일신문. 노태맹 시인 201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