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 (1871-1945)

(......)
내 육체여, 그 사고의 틀을 깨거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마시라!
바다에서 나온 신선함이
나에게 내 혼을 돌려준다...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로 달려가 다시 생생하게 솟아나자!
그렇다! 광란을 타고난 커다란 바다여,
표범 가죽이여, 숱한 태양의 영상으로
구멍 뚫린 희랍 외투여,
침묵과 같은 소란 속에서
반짝거리는 네 꼬리를 물어뜯는
너의 푸른 몸뚱이에 취한 단호한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폈다가 다시 접는다,
가루 같은 물결이 바위에서 솟아난다!
날아가거라, 정말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희열하는 물로 부숴라
삼각 돛들이 모이를 쪼고 있던 이 지붕을.
(김현 번역)

해변의 묘지는 우리의 시간이 묻힌 언덕이다. 그 언덕에서 우리는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파도의 포말이 되는 것을 보아왔다. 그 언덕에서 우리는 가난한 우리의 아비들이 작은 배의 섬광이 되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도 보아왔다. 해변의 묘지는 ‘한숨이 요약하는 시간의 사원’. 우리도 언젠가 죽음이라는 ‘순수한 사건’을 그 시간 속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파도로 달려가 다시 생생하게 솟아나자!’고 결의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발레리는 ‘빛을 돌려준다는 것은 침침한 반쪽 그늘이 남는다는 뜻’이라고 이 시에서 표현한다. 그늘은 우리를 짓누르는 고통이지만 그것으로 하여 빛은 빛으로 드러난다. 영원은 ‘검고 금빛 나는 연약한 불멸’일 따름이다. 

시인은 컴컴한 절망도 불후의 생명도 꿈꾸지 않는다. 우리가 발 디딘 이 ‘해변의 묘지’야 말로 우리가 탐구해야 할 ‘가능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매일신문. 노태맹 시인 2015.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