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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 년도 더 전의 어느 해 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이 담임 선생님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자 그 선생님은 이형기의 낙화의 다음 구절을 적어 놓고 교실 문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그때 나는 그것이 격(格)에 맞지는 않지만, 꽤나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시의 한 구절을 생각해내어 적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라면 문학이란 대상을 놓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하기에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이 말은 문학이란 특별히 외계에서 온 이물질도 아니요, 접근하기 어려운 고고하고 높은 정신의 얼개로 짜여진 인생론의 그물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누구나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또한 유명한 시 한두 구절쯤은 가볍게 외우며 즐기는 그런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문학이란 대상을 자신과 먼 곳에 있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더군다나 이야기는 잘하면서 그것을 글로 옮기는 쓰는 일에 자신 없어하는 것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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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문학을 지나치게 개념화된 대상으로 파악시키려한 교육의 문제가 한 요인일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논리의 대상으로 개념화함으로 이야기는 딱딱한 화석처럼 차갑게 와 닿게 된다. 한창 감수성의 폭을 넓힐 시기에 문학에 대한 혐오가 먼저 심어지는 요인인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어떤 시든, 소설이든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은 걸작이며, 심오한 사상이나 인생의 깊이가 있다는 전제 아래 단순한 시어마저 그냥 두고 보지 못하고 부연의 깊이를 더하여 해석하는 해설서-교사를 포함 모든 참고서들-들 또한 문학을 왜곡시키는 한 도구이다. 더나아가 시험에서문제가 그렇게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감상(鑑賞)을 바탕으로 한 문제를 내면 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고, 학생들은 문제로 출제되는 내용들이 중요한 이해의 기틀인 양 문학을 대하게 된다는 점에서 비극의 악순환-그렇게 배운 학생이 또다시 교사가 되어 그렇게 가르침으로- 은 해소될 기미가 없어진다. 수학능력 평가체제는 이러한 오류를 줄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점차 유야무야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쉬운(?) 작품을 어렵게 이해하고 스스로의 느낌을 찾아 정리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이야기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지게 된다. 그 결과 글을 쓴다는 일을 특수한 능력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여기고, 문학과는 더욱 동떨어진 세계로 나아가 버린다.

  다음으로 서구의 합리적 사고가 인간의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인식 방법으로 인한 문제일 것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면서 동시에 감성적 동물이다. 세계는 이성의 힘, 합리적이고 분석적 사고가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고 생각한 서구적 사고, 이 사고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하여 이미 무너진 관념의 하나인데도 우리는 아직 그런 사고를 지성의 표본인 양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문학에 대한 거리감을 형성하는 한 요인이다. 또 우리의 전통 유교 사상도 이러한 생각에 한몫을 했다. 문학은 도를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 더나아가 문학은 목적이 아니라 도를 전달하고자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어 인간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문학 작품을 낮춰 보고, 문학 속에는 참삶의 교훈이 내포되어야 한다고 믿고, 실제로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러한 도덕율이나 인생론을 찾으려고 하며 그런 대상을 찾을 수 없을 때 강한 부정의 시각을 보낸다. 이러한 생각은 장정일의 소설을 두고 내린 법원의 판단과 같다. 이러한 생각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성의 힘만이 위대하다고 하면서 감성의 힘은 저급한 정열쯤으로 치부해버리는 우스꽝스런 사람들만이 남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에는 관심을 가지는 모순 속에 살아간다. TV드라마나 영화(매체를 달리하나 이야기라는 점은 문학과 동일함)를 즐기는 심리의 저변은 이야기에 대한 관심(호기심)인데, 언어로 나타나는 이야기는 거부하고 시각으로 나타나는 이야기는 가까이하려는 기현상(?-필자의 자의적인 판단)이 나타난다. 물론 문학은 분석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접하기 어렵고, 시각적 대상은 보이는 대상이라 쉽게 이해될 것이라는 선입견-실상 시각적 대상이라 할 지라도 상징적 의미나 치밀하게 짜여진 구조를 스쳐 지나가는 화면 속에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의 작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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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든 솔깃하게 하는 매력이 숨어있다. 비밀스런 이야기라면 더욱 소름이 돋도록 즐기려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누구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충동을 느낀다. 이로 인해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또 어떤 이야기는 오래 기억 속에 남겨두고 싶어한다. 머리 속에 기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느끼고 세상을 안다. 세상을 안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야기라는 말 속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온 그릇이란 뜻이 숨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는 사람들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날까지 가장 오래 남아있을 가까운 벗인 셈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인 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나타나고, 다양한 삶의 그릇이 마련된다. 동시에 그릇의 종류도 많아지게 된다. 단순한 이야기가 복잡한 이야기가 되고, 때론 사랑을 담다가 때론 분노를 담기도 하고, 사람들의 온갖 느낌이 다양한 그릇을 통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그릇만 보고, 어떤 사람은 그릇 속의 느낌만 보고, 어떤 사람은 그릇과 느낌이 어울리는 지도 본다. 그로 인해 삶은 더욱 다양하고 삶에 대한 느낌도 더욱 깊어진다. 더욱 깊어지고 다양해진 삶에 대한 생각은 또 다른 이야기의 그릇에 담기고, 한결 깊어진 삶의 가치를 느끼고 보고 나의 이야기로 실천해 보려고도 한다.  

  단순한 이야기가 이렇게 삶의 깊이까지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며, 상상 속에 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한 상상 속의 또다른 인생은 거짓말이 아닌 또 하나의 세계, 진실된 삶의 세계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가시적인 세계-만을 인정하고 비현실이나, 상상의 세계를 인정하려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자신이 곧잘 백일몽이나, 환상, 꿈을 꾼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꿈, 환상은 바로 자신이 바라는 또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이야기란 말 속에 언어에 의해 전달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전제로 생각한다.- 즉 문학은 머리 속에 살아 숨쉬는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객관적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나 부정할 수 없는 세계가 문학의 세계이리라. 결국 문학은 사람들 스스로의 머리 속에 살아있는 세계이다. 교과서적인 개념으로 현실 원칙은 쾌락원칙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으며, 현실원칙을 반성하는 자리의 마련으로 문학이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면서도 문학이란 개념을 들먹이면, 곧잘 문학을 어렵다고 하거나,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더구나 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부조리 문학이니, 초현실주의 문학기법이나 하면 더더욱 힘들어하고 아예 접근마저 꺼리는 경향도 있다. 또한 무엇으로 인해 문학이란 허황(虛荒)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까? 더 나아가 문학은 삶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극단적 어휘가 더러 나타날까?  이러한 말이나 생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아마 재미있는 현상을 찾아 낼 수 있지는 않을까? 이는 우리 스스로가 지나치게 현재에만, 현실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심리의 한 표층을 드러낸 것에 따른 반응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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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그 이야기에서 느끼는 생각이 있게 마련이다. 재미있다든가 재미없다든가 아니면 들어줄 만하다든가 듣기가 힘들다든가 등의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판단이 나타남은 나의 삶을 바탕으로 나의 생각과 통하는가 통하지 않는가의 대비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의 자세, 태도, 또는 윤리관에 의하여 달라질 것이다. 비록 자신의 생각이 짧고 단순해서 느낀 바가 그리 많지 않아도 스스로 느낀 바를 말할 수 있고, 말로 이루어진 것을 글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훌륭한 감상이 된다. 굳이 남들의 평가, 해석에 기댈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남들의 평가나 해석은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장애물이 되며, 편견을 안겨줄 수도 있다. 다음을 보자.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모닥불 -  백석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별로 할 일이 없이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거기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도 아닌, 그리 신통한 화목도 아닌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여 불러일으키는 불이다. 싱겁기 짝이 없는 소재들이 모여 피워내는 그 불에 마을 사람들은 불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너남없이 모인 것이다. 특별히 모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모두가 불을 마주하여 모닥불을 쪼이는 광경에는 어둑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더 나아가 모닥불에라도 기대어 따뜻한 정을 꿈꾸던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도 있다. 할아버지가 겪은 어린 날의 슬픔이 지금 모닥불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의 가슴 모두에 있는 듯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로 인해 어렵고 힘든 시대를 작은 불에라도 의지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인정을 느끼고, 그것을 따뜻이 이야기하는 시인의 다정한 마음도 함께 불 속에 살아오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의 과정이 글쓰는 이의 혼자 생각일까.

  아니면 이렇게 보면 어떨까? 누군가 쓰레기들을 모아 태우고 그 연기를 본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자신의 집에 있는 쓰레기들이 생각나 들고 나와 태우고,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너남없이 모닥불을 쪼이게 되었고, 그 속에 자기 나름의 생각에 잠겨 두런거리거나, 팔짱을 끼고 서고, 발끝으로 실없이 긁적거리기도 하는,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주인공은 할아버지의 옛날이 떠올라 가슴 아리면서도 자신을 있게 한 할아버지의 정을 더욱 따뜻하게 모닥불 속에서 느끼고 있는 모습. 그래서 할아버지의 정을 모닥불처럼 여기는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대한 판단도 이러한 나의 생각을 바탕으로 남들도 이와 같은 생각과 판단을 내릴 것인가를 생각하여 보면 공감의 폭이든, 보편적인 정감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느끼는 생각은 바로 이야기에 대한 평가 작업인 셈이다. 이야기 속에 나타난 내용이나, 이야기를 꾸미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때로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투에서 이러한 판단이 나타난다. 또한 동일한 이야기라도 듣는 사람이 지닌 태도에 따라서 재미의 기준이 달라지고, 가치 판단이 달라진다. 이러한 사실을 좀더 관념적 어휘를 동원한다면, 텍스트의 성격과 전달자의 의도, 그리고 독자의 심미적 관점의 차이에서 다양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단순히 이야기의 내용을 듣는데만 치중하지 말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태도, 말투, 또는 표정 하나까지 여유롭게 살펴가며 듣고 보아야 하며, 더 나아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아니면 이야기하는 사람이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이 어떻게 같고 다른 지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함께 느껴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문학의 출발이 되고 종점이 되는 것이다. 문학은 난해한 것이 아니다.

  율리시즈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탄생 일백 주년 기념일에는 더블린 시내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조이스를 우상적 존재로 여기는 더블린 사람들은 조이스를 결코 난해한 작가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정감을 가장 잘 살린 작가로 평가된다. 조이스는 이야기꾼이되, 절묘한 가락을 잘 살려 아일랜드인들의 마음 속에 공감의 폭을 넓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일랜드 국립방송에서는 성우들에게 38시간동안이나 율리시즈를 낭독하게 하여 전국민의 찬사를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이야기를 하고픈 마음과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마음의 교류가 더 훌륭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 즉 문학을 형성해나고 싹을 틔우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김유정과 같은 작가가 있어 그의 글은 읽는 재미가 아주 풍부하다. 김유정의 작품에 나타난 어휘를 외국어로 옮긴다면 그러한 정감을 느낄 수가 있을까? 아니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나오는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하나 먹고 싶다'고 한 것도 우리의 정감과 삶의 폭을 다른 어떤 외국어로 옮겨도 그 깊이있는 맛은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정감을 잘 살린 문학을 즐기고, 누리는 생활, 그로 인해 인생의 폭도 깊이도 맛보는 생활이 필요하지 않을까? 외국 문학의 깊이만을 찬양하지 말고……. 우리 문학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고 문학에 대한 선입견부터 바로 잡아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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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식적으로 나누어 보고, 관념의 대상으로, 논리적 분석의 대상으로 문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 이야기로 함께 나누고 싶어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하나로 문학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제 문학을 기괴망측한 동물을 대하듯 논리의 메스를 대지 말로 우리의 일상 대화 속에 한 구절쯤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이야기를 위해,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보아야 한다.  

  봄날 따뜻한 햇살 아래 수업도 지겨울 때는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나의 누가는 어떻게 생긴 이일까 하는 이야기에, 졸고 있는 강아지를 보면서 조놈이 고양이라면, 이장희의 시가 과연 어울릴까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우리네 용감한 동백꽃의 점순이, 그 점순이의 아우라 할 수 있는 황순원의 소설, 학에 나오는 덕재 마누라 꼬맹이, 하늘 높은 줄은 몰라도 땅넓은 줄은 안다고, 올 가을에 첫애를 낳는다는 이야기, 그러다 불쌍한 초봉이도 떠올리고, 그러다 보면 따뜻한 봄 햇살 속으로 살아가고 살아가는 또다른 우리를, 나를 만날 수 있지 않는가. 그런 이야기로 졸음도 날리고, 우리의 생활 깊숙히 스며 있는 이야기의 세계를 누리게 되고 우리의 삶도 좀더 여유있고 너그러워지고,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도 조이스와 같은 작가가 있어 자랑스레 웃으며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철학과 사상은 뼈대가 앙상히 드러난 관념으로 인해 삶을 딱딱하게 하며,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늘상 분노와 부끄러움에 잠기게 한다. 그러나 문학은 우리의 삶에 윤기를 주고 삶의 아름다움을 지닌 유일한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 저녁놀을 보면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정도는 생각도 하고, 이광수의 무정에서 형식이 보여주는 무모하리 만큼의 맹목적 낙관도 때론 삶의 어려움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문학을 맞이하면 인생이 즐거워지며, 아름답고, 넉넉한 삶의 윤기가 마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