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朴寅煥)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 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아 최후로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

<박인환 시선집,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