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러치 히터’ ‘머니 플레이어’ ‘미스터 10월’ 등이 큰 경기와 위기에서 빛을 내는 선수를 일컫는 말들이다. 정규시즌 때는 잘하다가도 플레이오프때 약한 선수를 ‘미스터 5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농구황제’ 마이클조던의 복귀를 모두 반기는 이유도 그가 결정적인 승부에서 강했고 팀을 6차례나 NBA 정상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코리안특급’ 박찬호는 아직 플레이오프 마운드에 서보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큰 경기에 약하다 강하다를 파악할 길이 없다. 그러나 비록 플레이 오프 경험은 없었으나 올 시즌 유난히 승부처에서 약한 면을 보여 위기에 약하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언론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북어 두들기듯 했다. 

큰 경기에 강하고 약하고는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에게 국한되는 얘기다. 연봉이 싸면 비난받을 일도 없다. 연봉 40만달러를 받는 선수에게 큰 경기나 위기에 약하다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박찬호의 연봉은 올해 올스타 인센티브 10만달러를 포함해 1000만 달러였다. 메이저리그 통틀어 22위인 고액연봉자다. 당연히 이에 대한 평가가 따를 수밖에 없다. 

박찬호는 지난해까지 후반기에 강했고 9월에 더욱 힘을 발휘해 주가를 높였다. ‘여름 사나이’ ‘9월의 사나이’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정작 포스트시즌 진출이 걸려 있던 올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저스는 올해 시즌 종료 5경기를 남겨두기 전까지 플레이오프 탈락이 결정되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경쟁과 상관 없이 마운드에서 공을 뿌렸던 지난 5년과는 상황이 달랐다. 풀이하면 경쟁이 없었을 때는 편안한 상태에서 잘 던졌고, 심리적 부담을 느꼈던 올해는 부진했던 것이다. 미국 매스컴에서 흔히 사용하는 ‘프레셔 (Pressure)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있다. 

기록을 살펴보자. 지난 5년 동안 전반기 31승25패 방어율 4.45,후반기 34승18패 3.19를 기록했다. 9∼10월엔 14승7패 3.12였다. 지난해에는 전반기 9승6패 4.17, 후반기 9승4패 2.23을 기록했다. 9월엔 4승2패 1.87로 역투했다. 

그런데 올해는 전반기 8승5패 2.80, 후반기 7승6패 4.40이었고 9월에는 2승2패 4.78을 기록했다. 종전과는 완전히 거꾸로였다. 허리 통증이 결정적이었으나 전문가들을 설득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구석이 많다. 

전반기에는 에이스 케빈 브라운의 부상공백을 메우며 ‘스토퍼’ 구실을 다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팀이 스퍼트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구원에서 선발로 변신한 테리 애덤스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저스 선수들은 올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된 결정적인 게임으로 8월10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전을 꼽았다. 이날 경기 전까지 다저스는 4연승을 거두며 2위 애리조나와의 격차를 1.5게임으로 유지하며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박찬호는 4연승의 상승세를 업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러나 기대와 동떨어진 내용으로 5이닝 동안 홈런 2개를 포함해 7안타를 내주고 7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됐다. 1회부터 무기력했다. 다저스는 약체 피츠버그에 덜미를 잡히고 필라델피아와 몬트리올에 패함으로써 5연패의 수렁에 빠져 선두자리를 빼앗기고 3위로 주저앉았다. 

다저스는 이후 단 한 차례도 순위를 올리지 못하고 3위로 시즌을 마쳤다. 당시 박찬호는 승부처에서 팀의 연승에 찬물을 끼얹은 패전투수였다. 승부세계에서 ‘만약’이라는 말은 필요 없지만 박찬호가 이 게임을 잡아줬다면 다저스의 2001시즌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다저스는 ‘스토퍼 박찬호’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위기에 약한가’라는 질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