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 작품. (조선일보)

이순신연표

1545년 4월28일 서울건천동에서 출생
1576년  무과급제(32세)
1587년  여진족 침입에 패하였다고 구속
1591년 전라수군절도사임명

1592년 4월 임진왜란발발
1592년 7월 한산대첩
1593년 1월 웅포해전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2월 원균과 불화로 구속
1597년 4월 사면 백의종군

1597년 7월 원균 대패로 복직
1597년 9월 명랑대첩
1598년 노량해전   전사

1604년  덕풍부원군 추봉 좌의정 가증
1688년 명량대첩비 건립
1705년 현충사 건립
1793년 정조 정일품 영위정으로 가증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인종 원년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11월 19일)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조선 중기 무신(武臣)으로 장수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격과 지도력을 갖추어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邊氏)의 아들로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1545년 서울에서 이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 관직을 지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변을 당한 일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이정은 백면서생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에는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러나 이백록의 기묘사화 연루 여부에는 논란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하였다고 하며 22살의 늦은 나이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 32살에 비로소 급제하여1586년까지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다.

1587년 당시 조산 만호이던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로 수금되었으나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1589년 당시 비변사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하게 되자 이산해가 천거하여 정읍 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만이었다. 곧 당상관의 직책인 만포첨사로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선정이 칭찬을 받게 되어 정읍에서 진도군수로 이배되어 부임되었으나 실제 부임되기도 전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의 추천으로 1591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때도 부제학 김성일 등 많은 신하들이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 30만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전라,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엇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옥포 해전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전라우수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사천 해전이다.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께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5월 7일 정오 옥포 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배 한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쫒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 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배 한척과 중간배 12척 작은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전라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배 한척, 중간배 일곱척, 작은배 여섯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 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7월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이 안성에서 승리를 하였다.

부산 대첩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배 9척, 절영도에서 큰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척의 배 중 적선 100여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꺽여지게 되었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사이에 틈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 있어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제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등 문제를 일으켜 두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원균은 여러번 이순신의 명을 어겨 이순신은 이를 조정에 보고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도원수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있던 원균과 친한 권신들은 원균 편을 들었고 이순신의 보고에서 실상과 다른 조목을 찾아내었다. 결국 이순신은 견책을 받았으며 원균은 충청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웅포 해전

1593년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으로 겁먹은 일본 수군은 과감한 전투대신 후퇴와 숨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역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3월 까지 계속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

6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 가덕도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3도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지방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능력이 보장되었다.

백의종군

초기 전세가 교착화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졌다.

교착화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 보다는 강화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전략적인 이유에서 수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 때 정탁의 도움으로 결백이 증명되자, 4월 1일에 사면되었고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들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복직

1597년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전열을 재정비 하기 위해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명랑 대첩

9월 14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랑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랑 해협은 일명 ‘울돌목’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의 전선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133척의 일본군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위험에 빠졌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노량 해전과 죽음

다시 재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1598년 노량진 앞바다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겨드랑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여 전열의 흐트러짐을 막으려 했다고 한다. 그는 53살의 나이에 전사하였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당일 유성룡 또한 조정에서 실각 되었다.

죽은 이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을 가증했다. (네이버 지식iN에서)

사진설명 -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역사년표Map BC -AD 1 -600 -1000 -1500 -1800 -1900 -1950 -1980-현재 (1945년이후 10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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