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는 왜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조회수 : 105     작성일 : 2003-03-26      


로또는 왜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엔돌핀의 사회심리학

2002년 월드컵의 열기와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신년 벽두부터 로또 복권이 전 국민을 또다시 엄청난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마치 구호물자 배급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 복권을 사기 위해 곳곳에서 사람들이 줄을 지어 늘어선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복권을 구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복권에 관심이 없는 것이 어쩌면 비정상인 것 아닌지 걱정마저 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온통 복권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다른 주제는 모두 시들해 지고 있다. 복권이 한 두해 있어온 것도 아닌데, 이러한 과잉 이상 열기가 생긴 이유는 단순히 당청금 액수가 높아져서 그런 것일까?


로또 복권을 신청한 그 순간부터 구입자는 왠지 모를 흥분에 휩싸이게 된다. 온갖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당첨자를 발표 할 순간이 초조하게 기다려진다.

“나는 절대로 안 될거야, 그냥 한번 해보는 거지 뭐”하는 생각에서 “혹시나 어쩌면 될지도 몰라”는 생각으로 하루 종일 왔다갔다 한다.


자기 전에는 1등에 당첨되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다 꿈나라로 가고, 혹시 좋은 꿈이라도 꾸었다면 다음날 여지없이 다량의 로또 복권을 구입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상사병에 걸려서 좋아하는 이성을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청춘남녀들처럼, 요즘 한국인들은 ‘복권사랑’에 푹 빠져서 하루하루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복권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요즘 주말이 되면 여가를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 대도시를 빠져나가는 수많은 차량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인생은 단 한번 뿐이므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서 즐겨야 남는 것이라는 심리가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요즘 한국 사람들은 틈만 나면 엔돌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엔돌핀은 대뇌의 쾌락중추가 자극 되었을 때 다량으로 방출되는 일종의 뇌 내 마약이라 할 수 있다. 엔돌핀이 심하게 자극되는 흥분과 행복감을 한번이라도 맛보게 되면 그 쾌감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유사한 자극을 찾게 된다. 그 때문에 흥분을 시킬 수 있는 자극의 강도는 계속 높아져 갈 수 밖에 없다.


우리 국민들은 이미 작년 월드컵 때에 그런 쾌감을 실로 오랜만에 맛보았다. 그 후유증으로 월드컵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로 복귀하여 감각을 회복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팀이 승승장구하던 쾌락의 드라마에 비하면 일상생활은 너무나 재미없고 시시한 것이 된다. 일상에 돌아와서도 과거와 달리 또 다른 자극을 내심 바라게 된다.


로또복권은 이렇게 월드컵이 매끈하게 닦아 놓은 경험중추를 따라 아무런 수고나 고충도 없이 엔돌핀의 전도사로 무혈입성 할 수 있었다.


로또 복권은 사람들의 엔돌핀을 증가시킨다. 재미있는 현상은 당첨금이 높아질수록 당첨자와 흥분을 공유하거나, 대리만족을 느껴보려는 사람들의 엔돌핀 추구욕망이 더욱더 가파르게 상승한다는 것이다. 자극 수준이 상승 될수록 그 이후부터는 그보다 적은 자극은 아무런 흥분도 주지 못하는 것이 ‘엔돌핀형 흥분‘의 특징이다.


그 결과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시간이 이전보다 점점 더 길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로또 복권 열풍은 한국사회에 새로운 “복권중독 증후군”을 만들어 가고 있다.


미리 정해진 희박한 확률에 기대 이른바 ‘돈놓고 돈먹기’로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복권의 운영방식은 한마디로 정선 카지노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지금 강원랜드에는 수많은 도박중독자들로 넘쳐나고 있고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만 간다. 도박으로 패가망신 하고서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계속 도박을 하게 강제하는 내성과 금단증상은 병적 중독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알콜중독이나 도박중독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특수한 사람들에게서나 발생하는 문제로 여겨지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안심하곤 한다. 하지만 로또 복권에 이르면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로또 복권 열풍과 같이 국민의 대부분이 자신도 모르게 참여하고 열광하는 사회증후는 사회적으로 다른 수많은 중독 증후군을 발생하고 확산시키는 모체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강한 엔돌핀의 자극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만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를 대체할 다른 자극들을 찾아다니게 된다. 기질적으로 중독에 빠지기 쉬운 잠재성 중독 위험군들이 로또가 제공해준 체험을 통해 자극적 엔돌핀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이들은 로또열풍이 잠잠해 지더라도 다른 자극을 찾아다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처럼 로또복권은 단순히 여가선용이나 오락을 수준을 넘어서 사회적 중독을 배양하고 확산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질환 중에 “조증”이라는 병이 있다. 조증 상태에 놓인 환자는 기분이 최고도로 고양되는 기분 좋은 체험을 하게 된다.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단숨에 재벌이나 대통령이 될 엄청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전에는 체험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자신감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체험은 흡사 마약에 취해 이른바 ‘뿅 가거나’, ‘홍콩 가는’ 느낌과 유사한 것이다.


가족들에 의해 입원치료를 받게 되고 ‘조증’에서 회복되고 난 후에, 환자는 왠지 모를 우울감을 오래 동안 힘들게 체험하게 된다. 환자의 기분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상태가 정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고양된 최고조의 흥분상태를 체험한 뒤라서 일상의 정상적인 기분이 상대적으로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치료적 교육을 통해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이해한 뒤라도 가끔 환자는 ‘조증’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소망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체험은 이처럼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조증이 유발시킨 병적 엔돌핀의 홍수는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장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로또 엔돌핀의 경우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한 복권사업이라 하더라도 상황이 이쯤 되면 섣불리 면죄부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그것의 사회적 의미와 타당성을 다시금 근본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백상빈 강릉아산병원 정신과 과장/단편영화감독)

조선일보 2003/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