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後漢)말 혼란기에 스스로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후예라고 일컬은 유비(劉備)가 황건적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호위라는 명분으로 싸움터를 전전하였다. 유비는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명신 제갈량(諸葛亮)을 막하에 불러들였고 208년 오(吳)나라와 연합하여 조조(曹操)를 적벽(赤壁)에서 물리쳤다. 형주를 확보하고 익주(益州)로 들어간 유비는 유장(劉璋)을 내쫓고 성도(成都)를 점령하였다. 220년 후한 헌제(獻帝)가 위(魏)나라에 선양(禪讓)하자 한(漢) 왕실 후계자로 자처하고 221년 청두에서 제위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丞相)에 임명하였다. 촉나라는 유비가 형주에서 데려온 사람들과 토착인사와의 연합정권이었다. 유비는 그의 장수 관우(關羽)를 죽이고 형주를 빼앗은 오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223년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아들 선(禪)이 즉위하자 제갈량은 유비의 천하통일의 뜻을 이어 후주(後主 ; 유비를 先主라 함) 선을 도와 국력증강을 도모하는 한편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남중(南中;雲南) 원정을 떠나, 227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위나라와 전쟁을 치렀다.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제갈량이 병사한 뒤 장완, 비위, 강유(姜維) 등이 정치와 군사를 담당했으나 물자도 적고 인재도 부족하여 내분이 일어났다. 환관 황호(黃皓)의 전횡으로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263년 사마소(司馬昭)가 이끄는 위나라 공격을 받아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하였다. |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같은 고향의 장비(張飛)와 탁군에 망명한 관우(關羽) 등과 손을 잡고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직접 지배하는 영토없이 각지의 호족 공손찬(公孫瓚), 도겸(陶謙), 조조(曹操), 원소(袁紹)들 사이를 전전하였다. 조조 밑에 있을 때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라고 하자 마침 벼락이 떨어져서 유비(劉備)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한 곳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였다. 유표의 밑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비육지탄의 푸념을 하는 한편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 등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제갈량에게는 삼고(三顧)의 예를 갖추어 맞이했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후 제갈량은 유비의 모신(謀臣) 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208년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남하해 오는 조조를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격파하고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기초를 쌓았다. 전쟁 후에 형주를 오(吳)나라와 양분하고, 손권의 누이를 황후로 맞이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익주(益州;지금의 四川省)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유비는 211년 익주목(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의해 촉나라에 들어가 성도(成都)를 공략하여 익주를 차지했다. 이에 손권은 조조와 손잡고 형주에 남아 있던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해 천하는 삼분되었다. 219년 한중왕(漢中王)이 되었고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한(漢;蜀漢),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했다. 그는 먼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영안(永安; 白帝城)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임종 때에 "이 아이(後主 劉禪)를 살릴 만한 가치가 없으면 그대가 나라를 차지하라"고 제갈량에게 유언했다. 능(陵)은 성도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제갈량의 무후사(武侯祠)가 더욱 유명하다. 시호는 소열제(昭烈帝). |
208년 적벽전(赤壁戰) 이후 군신(軍神), 복록장수신(福祿長壽神)으로서 추앙받았으며 촉의 오호장군(五虎將軍)로 그중 으뜸이었고, 훗날 오(吳)의 여몽에게 붙잡히게 되어 손권이 회유하려 했으나 의기를 끝까지 지키고 죽게된다. |
208년 위(魏)나라의 조조(曹操)가 남하하자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는 남으로 도피했는데, 장비가 당양(當陽)의 장판교(長坂橋 ; 湖北省 當陽縣) 위에서 창을 가로놓고 눈을 부라리며 "나는 장익덕이다. 누구든 와서 함께 사생결단을 내자" 라고 외친 일은 유명하다. 유비가 촉나라로 들어가자 그와 동행하였는데, 익주목(益州牧)인 유장(劉璋)이 임명한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과 대전하였을 때는 유장에 대한 엄안의 충절에 감명해 그를 빈객으로 모셨다. 유비는 장비를 파서태수(巴西太守)에 임명했고, 장비는 위나라 장수 장합의 파서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다. 그는 용맹했으나 평생토록 부하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항상 채찍으로 다스렸으므로, 유비는 언제나 그 점을 장비에게 충고하곤 하였는데, 오(吳)나라와의 싸움에 나가는 유비와 동행할 준비에 한창 몰두하고 있다가 부하의 손에 죽었다. 유비는 장비로부터 사자(使者)가 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장비가 죽었을 것임을 예감하였다 한다. 시호는 환후(桓侯). |
당시 형주목사였던 유표(劉表)를 찾아 온 유비(劉備)는 그의 평판을 듣고 207년 제갈량이 사는 곳을 방문, 세번째에 간신히 회견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삼고의 예(三顧之禮)"에 응한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 (天下三分之計)를 말하고, 화베이(華北)를 제압한 조조(曹操)에 대항하여 한(漢)나라 왕실을 부흥하기 위해 강남에 할거하고 있던 손권(孫權)과 연합, 스스로 형주와 익주(益州; 四川省)를 확보하여 독립할 것을 권했다. 유비는 이 계략을 기뻐하고 제갈량과 더욱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그 관계가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되었다. 208년 조조군이 남하하고 있을 때 유표가 병사하고 그 아들인 종(琮)이 항복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즉시 유비의 사자로서 손권에게 달려가 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결국 적벽(赤壁)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천하삼분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유비는 형주장관이 되고 제갈량도 창사(長沙) 등 3군(郡)의 감독을 맡았지만
211년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그 지방 장관인 유장(劉璋)과 대립하자 제갈량도
유비를 도와 촉나라에 들어갔고 214년 유비는 성도(成都)를 점령, 익주장관이
되었다.
위(魏)나라로부터 중위안(中原)을 다시 빼앗아 유씨의 한나라 왕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오(吳), 촉동맹을 굳히고 남쪽으로는 윈난(雲南) 지역의 이민족을 평정위무하여 후방의 불안을 제거함으로써 물자 보급을 용이하게 한 뒤, 227년부터 위나라에 대한 북벌에 전력을 다했다. 출진에 앞서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후주에게 올리고 우국충정을 토로한 뒤 7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이따금 관중(關中)에 진출해서 위나라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결국 여섯번이나 기산으로 나가 중원을 노렸으나 234년 오장원 군중에서 위나라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위와 싸우기 위해 출진할 때 올린 출사표와 마속(馬謖)의 일화는 유명하다. 시호는 충무(忠武), 무후(武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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