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원소(袁紹)를 격파하고 화베이(華北)를 통일하여 기주(冀州)의 업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208년 승상(丞相)이 되었다. 형주(荊州)로 남하하려 했으나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손권(孫權)과 유비(劉備)의 동맹군에 패했다. 뒤에 관중(關中)을 평정하고 헌제로부터 위공(魏公)의 칭호를 받았다. 한편 외척(外戚) 하후연(夏侯淵)을 보내 양주(凉州)를 평정했으며 황후 복씨(伏氏)를 폐하고 자신의 딸을 헌제의 황후로 삼았다. 한중(漢中;陝西省)에서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종교로 국가를 세운 장로(張魯)를 직접 정벌하였으며, 216년 작위가 위왕(魏王)에 이르렀다. 조조는 환관(宦官)의 양자(養子)의 아들로 기반이 없었지만 허를 비롯한 각지에 대규모 둔전(屯田)을 개발하여 식량을 확보하고, 모병(募兵), 유적(流賊), 강졸(降卒), 강민(降民), 유우(流寓)의 무리를 병호로 편성하여 전속군대로 삼았다. 신하 중에는 순욱(筍彧), 진군, 종요(鍾繇) 등 법가사상(法家思想)이 발달한 영천(潁川; 河南省) 출신들이 많았다. 220년 조조가 죽은 뒤 조비(曹丕)가 뒤를 계승했으며, 관리등용방법을 향거리선(鄕擧里選)에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인재등용이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귀족제도를 성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20년 헌제의 선양(禪讓)을 받은 조비가 즉위하여 문제(文帝)라 칭함으로써 후한이 멸망하고 위나라가 성립되었다. 도읍을 업성에서 뤼양으로 옮겼으며, 서역(西域)의 언기(焉耆), 선선, 구자(龜玆), 우전 등도 종속시켰다. 명제(明帝)는 낙양궁을 정비하고 태극전(太極殿)과 소양전(昭陽殿)을 건립했으며,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을 격파했다. 제왕(齊王) 방(芳) 때에는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쳐 영토를 확장했고, 야마타이국(邪馬合國)의 비미호(卑彌呼)는 조공을 바쳤다. 명제가 죽은 뒤 제왕 방, 고귀향공(高貴鄕公) 모, 진류왕(陳留王;元帝) 환(奐) 등 삼소제(三少帝)가 계승했고 조상(曹爽)과 사마의가 보필했다. 사마의는 종실(宗室)인 조상과 외척인 하안(何晏), 하후현(夏侯玄)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제왕을 폐했고,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司馬昭)는 고귀향공을 살해했다. 265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진류왕의 선양을 받고 즉위하여 진(晉;西晉)나라를 건국함으로써 위나라는 멸망했다. 문화면에서는 조신(朝臣)이 귀족화되고, 문학, 음악, 서화 등 예술이 발달했으며,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역학(易學)이 청담(淸談)의 주제가 되었다. |
조조는 20세에 효렴(孝廉)에 천거돠었고, 낭중(郎中)이 된 뒤부터는 무직(武職)과 현령국상(縣令國相)을 지냈다. 강대한 군사력을 거느린 동탁(董卓)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자, 189년 연주 기오(己吾)에서 군사를 일으켜, 원소(袁紹)를 맹주로 삼는 동탁토벌군에 참가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했고 도망하는 병사도 많았다. 동탁이 죽자 원소와 원술(袁術) 등 군웅들이 할거하면서 대립했다. 192년 청주(靑州)의 황건군(黃巾軍)이 연주에 침입하자 조조는 이때를 틈타 연주목(牧)을 삼고, 이들을 맞아 싸웠으며, 황건군의 정예부대 30만을 수하에 편입시켜 연주 견성을 거점으로 군벌을 형성했다. 또 도겸(陶謙)과 여포(呂布)를 격파하여 동방의 서주(徐州)로 세력을 뻗쳤고, 원술과 황건군의 지배 아래 있었던 서쪽 예주(豫州)의 일부를 지배했다. 청주의 황건군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투항한 황건군과 모병한 군인, 그리고 유민 등을 흡수하여 직속군대로 편성했고 병(兵)과 민(民)을 신분상으로 분리했다. 195년 헌제가 연주목으로 임명했고, 196년 헌제를 예주의 허(許)에 맞이하고 조지(棗祗)의 헌책을 받아들여 허 등의 주군(州郡)에 전관(田官)을 두고 둔전(屯田)을 시작하여 군량 확보에 힘썼다. 이렇게 하여 조조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자 기주(冀州), 청주, 병주(幷州), 유주(幽州)에서 군벌을 형성하고 있던 원소와 대립하게 되었다. 200년 관도(官度)의 싸움에서 원소를 대파하고 화베이(華北) 전체를 거의 통일한 조조는 기주목(冀州牧)을 영유하고 업으로 옮겨서 근거지로 삼았다. 이 무렵에 시행한 전조(田租)와 견면(絹綿)을 징수하는 세제는 서진(西晉) 세제의 선구가 되었다. 208년 후한의 승상이 된 조조는 계속해서 순욱(荀彧), 진군(陳群), 종요(鍾繇) 등을 속관(屬官)으로 임명했다. 그의 심복에는 법가형명학(法家刑名學)의 전통이 뿌리깊게 남아 있는 영천(潁川) 출신이 많아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육형(肉刑) 등에 그 영향이 나타나 있다.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자 조조는 양양(襄陽) 등 형주 북부를 합병했고, 다시 남하하여 강릉(江陵)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유비(劉備), 손권(孫權)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회전(會戰)했으나 패하여 천하가 삼분(三分)된 형세를 이루었다. 조조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관중(關中)을 평정하고 위공(魏公)에 올랐으며, 셋째딸을 헌제의 후궁으로 삼게 했다. 이어서 외척 하후연(夏侯淵)에게 양주(凉州)를 평정케 하여 영토의 확장을 꾀했고, 황후 복씨(皇后伏氏)를 폐한 다음 둘째 딸을 헌제의 황후에 오르게 했다. 또 그는 한중(漢中)에서 세력을 가진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수령 장로(張魯)를 직접 정벌하고 216년 위왕(魏王) 자리에 올라 사실상 황제가 되었다. 그는 박식하고 예능에도 능했으며 시부(詩賦), 초서, 음악, 바둑, 방술(方術)도 잘했고, 병서와 병법 등 문무 양면에 매우 뛰어났다. 시호는 무제(武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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