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책의 뒤를 그의 아우 손권(孫權)이 계승하여, 장소(張昭), 주유(周瑜), 정보(程普) 등을 중용했다. 유표가 죽은 뒤 조조가 남하하여 형주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손권이 유비(劉備)와 동맹하여 208년 적벽(赤壁) 싸움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영남(嶺南)을 귀속시켰으며 영토를 다시 타이완(臺灣)과 인도차이나까지 확장했다. 유비와 형주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다투다가 양보를 받아 형주의 중부지방을 차지했다. 유비는 남부를 귀속했는데, 손권은 그곳에 머물러서 수비하던 관우(關羽)를 죽이고 그곳도 병합했다. 조조가 죽은 뒤에 조비(曹丕)가 계승했으며 헌제(獻帝)의 선양을 받아 문제(文帝)가 되어 220년 위(魏)나라가 성립되었다. 문제는 손권을 번병(藩屛)으로서 오왕(吳王)에 봉했다. 유비가 위나라에 대항하여 촉(蜀) 제호(帝號)를 칭했기 때문에, 222년 손권도 스스로를 오왕이라 칭하고 건국해서 악(鄂)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229년 황제에 즉위, 건업(建業;南京)으로 천도했다. 손권이 죽은 뒤 손량(孫亮), 손휴(孫休), 손호(孫皓) 등 세 사람이 뒤를 이었으나 정권이 안정되지 못했고 어린 손호가 진(晉, 西晉)에 항복함으로써 280년에 오는 멸망했다. 오는 오군오현(吳郡吳縣)의 고(顧), 육(陸), 주(朱), 장(張) 등 4성씨의 토착호족이 기반을 다져 강남지방을 개발해 나갔다. 종민(宗民)과 산적을 토벌하여 호족의 군사와 소작인으로 삼기도 하고, 군현의 백성으로 편입시켜 국력을 키웠다. 또 장군이 군사와 봉읍(封邑)을 세습하는 등의 독자적인 제도를 볼 수 있다 |
208년 남하하려는 조조의 군대를 유비와 동맹하여 적벽(赤壁)에서 격파하였고,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그와의 관계를 밀접히 하였다. 그러나 형주(荊州) 영유를 둘러싸고 유비와의 대립이 심화되자, 다시 조조와 동맹을 맺고 유비의 무장 관우(關羽)를 공격하여 형주 영유에 성공하였다. 그뒤 위(魏)나라의 문제(文帝)가 나서서 오왕(吳王)으로 봉하였지만, 222년 독자적으로 연호를 황무(黃武)로 정해 독립을 표방하였다. 유비가 죽은 후, 촉(蜀)나라와 동맹하여 위나라와 대립하였으며, 229년 황제에 올랐다. 영토확장정책을 펴 인도차이나반도까지 그 세력을 넓혔다. 시호는 대제(大帝). |
208년 위(魏)나라의 조조(曹操)가 형주(荊州)의 북부를 병합하자 오나라는 항복론자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주유 한 사람만이 주전론을 폈고 촉(蜀)의 유비(劉備)와 동맹,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선을 태워 위군(魏軍)을 패퇴시켰다. 주유는 또 형주에서 유비의 세력확장을 경계, 파촉(巴蜀)의 점령을 진언했지만 사천공략(四川攻略)을 앞두고 병사하였다. 제갈량의 계략에 번번이 넘어가자 화살에 의해서 상처 입었던 부분이 터져 통분한 나머지 선상에서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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