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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蜀)나라 : 중국 삼국시대 왕조(221∼263)로 정식 국호는 한(漢). 쓰촨성 (四川省), 즉 촉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영토로 삼았으므로 촉, 촉한(蜀漢)으로 통칭된다. (삼국지관련 고사성어 전체) 
 
후한(後漢)말 혼란기에 스스로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후예라고 일컬은 유비(劉備)가 황건적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호위라는 명분으로 싸움터를 전전하였다. 유비는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명신 제갈량(諸葛亮)을 막하에 불러들였고 208년 오(吳)나라와 연합하여 조조(曹操)를 적벽(赤壁)에서 물리쳤다. 형주를 확보하고 익주(益州)로 들어간 유비는 유장(劉璋)을 내쫓고 성도(成都)를 점령하였다. 

220년 후한 헌제(獻帝)가 위(魏)나라에 선양(禪讓)하자 한(漢) 왕실 후계자로 자처하고 221년 청두에서 제위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丞相)에 임명하였다. 촉나라는 유비가 형주에서 데려온 사람들과 토착인사와의 연합정권이었다. 유비는 그의 장수 관우(關羽)를 죽이고 형주를 빼앗은 오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223년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아들 선(禪)이 즉위하자 제갈량은 유비의 천하통일의 뜻을 이어 후주(後主 ; 유비를 先主라 함) 선을 도와 국력증강을 도모하는 한편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남중(南中;雲南) 원정을 떠나, 227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위나라와 전쟁을 치렀다.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제갈량이 병사한 뒤 장완, 비위, 강유(姜維) 등이 정치와 군사를 담당했으나 물자도 적고 인재도 부족하여 내분이 일어났다. 환관 황호(黃皓)의 전횡으로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263년 사마소(司馬昭)가 이끄는 위나라 공격을 받아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하였다. 

 
유비(劉備) :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 왕(221∼223). 자는 현덕(玄德). 탁군(河北省) 출신.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이며, 중산왕(中山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귀가 컸으며 또한 손을 내리면 손끝이 무릎까지 닿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멍석을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같은 고향의 장비(張飛)와 탁군에 망명한 관우(關羽) 등과 손을 잡고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직접 지배하는 영토없이 각지의 호족 공손찬(公孫瓚), 도겸(陶謙), 조조(曹操), 원소(袁紹)들 사이를 전전하였다. 

조조 밑에 있을 때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라고 하자 마침 벼락이 떨어져서 유비(劉備)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한 곳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였다. 유표의 밑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비육지탄의 푸념을 하는 한편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 등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제갈량에게는 삼고(三顧)의 예를 갖추어 맞이했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후 제갈량은 유비의 모신(謀臣) 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208년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남하해 오는 조조를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격파하고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기초를 쌓았다. 전쟁 후에 형주를 오(吳)나라와 양분하고, 손권의 누이를 황후로 맞이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익주(益州;지금의 四川省)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유비는 211년 익주목(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의해 촉나라에 들어가 성도(成都)를 공략하여 익주를 차지했다. 이에 손권은 조조와 손잡고 형주에 남아 있던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해 천하는 삼분되었다. 

219년 한중왕(漢中王)이 되었고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한(漢;蜀漢),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했다. 그는 먼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영안(永安; 白帝城)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임종 때에 "이 아이(後主 劉禪)를 살릴 만한 가치가 없으면 그대가 나라를 차지하라"고 제갈량에게 유언했다. 능(陵)은 성도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제갈량의 무후사(武侯祠)가 더욱 유명하다. 시호는 소열제(昭烈帝). 

관우(關羽)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신. 자는 운장(雲長). 산시성 (山西省) 출생. 후한말(後漢末) 유비(劉備)·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를 굳게 지켰다. 황건적 토벌때 부터 수 많은 전적을 세웠으며 뛰어난 무공과 위엄으로 중원천지를 울리니 그를 따라갈 장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조(曹操)에게 포로가 된 뒤 우대를 받으며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함받기도 했으나, 오관을 돌파하며 단신으로 육장(六將)을 참한 일은 너무나도 유명하며 한평생 유비에게 충성했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이후 군신(軍神), 복록장수신(福祿長壽神)으로서 추앙받았으며 촉의 오호장군(五虎將軍)로 그중 으뜸이었고,  훗날 오(吳)의 여몽에게 붙잡히게 되어 손권이 회유하려 했으나 의기를 끝까지 지키고 죽게된다.

장비(張飛) : 중국 삼국시대의 촉(蜀)나라 무장. 자는 익덕(益德). 탁군 출신. 유비(劉備)와는 동향이며, 유비가 군사를 일으키자 관우(關羽)와 함께 참가했고, 그 뒤로 행동을 같이하였다. 관우보다 몇 살 아래였으므로 관우를 형님으로 모셨다. 

208년 위(魏)나라의 조조(曹操)가 남하하자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는 남으로 도피했는데, 장비가 당양(當陽)의 장판교(長坂橋 ; 湖北省 當陽縣) 위에서 창을 가로놓고 눈을 부라리며 "나는 장익덕이다. 누구든 와서 함께 사생결단을 내자" 라고 외친 일은 유명하다. 

유비가 촉나라로 들어가자 그와 동행하였는데, 익주목(益州牧)인 유장(劉璋)이 임명한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과 대전하였을 때는 유장에 대한 엄안의 충절에 감명해 그를 빈객으로 모셨다. 

유비는 장비를 파서태수(巴西太守)에 임명했고, 장비는 위나라 장수 장합의 파서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다. 그는 용맹했으나 평생토록 부하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항상 채찍으로 다스렸으므로, 유비는 언제나 그 점을 장비에게 충고하곤 하였는데, 오(吳)나라와의 싸움에 나가는 유비와 동행할 준비에 한창 몰두하고 있다가 부하의 손에 죽었다. 유비는 장비로부터 사자(使者)가 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장비가 죽었을 것임을 예감하였다 한다. 시호는 환후(桓侯).

 
제갈량(諸葛亮) :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승상. 양야양도(山東省 沂水縣) 출신. 본명이 양(亮)이어서 제갈량이지만 자(字)인 공명(孔明)으로 더욱 유명하다. 한의 사례교위 제갈풍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숙부를 따라 형주(荊州; 湖北省) 양양의 융중 언덕에서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밭을 갈고 독서로 소일하며 생활하였는데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당시 형주목사였던 유표(劉表)를 찾아 온 유비(劉備)는 그의 평판을 듣고 207년 제갈량이 사는 곳을 방문, 세번째에 간신히 회견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삼고의 예(三顧之禮)"에 응한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 (天下三分之計)를 말하고, 화베이(華北)를 제압한 조조(曹操)에 대항하여 한(漢)나라 왕실을 부흥하기 위해 강남에 할거하고 있던 손권(孫權)과 연합, 스스로 형주와 익주(益州; 四川省)를 확보하여 독립할 것을 권했다. 유비는 이 계략을 기뻐하고 제갈량과 더욱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그 관계가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되었다. 

208년 조조군이 남하하고 있을 때 유표가 병사하고 그 아들인 종(琮)이 항복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즉시 유비의 사자로서 손권에게 달려가 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결국 적벽(赤壁)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천하삼분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유비는 형주장관이 되고 제갈량도 창사(長沙) 등 3군(郡)의 감독을 맡았지만 211년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그 지방 장관인 유장(劉璋)과 대립하자 제갈량도 유비를 도와 촉나라에 들어갔고 214년 유비는 성도(成都)를 점령, 익주장관이 되었다. 
 
221년 촉한(蜀漢)이 성립되어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보좌하였지만, 223년 위독해진 유비는 후사(後事)를 제갈량에게 부탁하고 죽었다. 제갈량은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할 것을 맹세하고 드디어 승상으로서 국사를 주재했다. 

위(魏)나라로부터 중위안(中原)을 다시 빼앗아 유씨의 한나라 왕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오(吳), 촉동맹을 굳히고 남쪽으로는 윈난(雲南) 지역의 이민족을 평정위무하여 후방의 불안을 제거함으로써 물자 보급을 용이하게 한 뒤, 227년부터 위나라에 대한 북벌에 전력을 다했다. 출진에 앞서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후주에게 올리고 우국충정을 토로한 뒤 7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이따금 관중(關中)에 진출해서 위나라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결국 여섯번이나 기산으로 나가 중원을  노렸으나 234년 오장원 군중에서 위나라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위와 싸우기 위해 출진할 때 올린 출사표와 마속(馬謖)의 일화는 유명하다. 시호는 충무(忠武), 무후(武侯).

방통(龐統) : 일찍이 수경선생 사마휘가 방통(龐統)을 남주지사의 첫째라고 칭했으며 봉추라고 불리우면서 제갈량과 같이 이름을 떨쳤다.적벽대전에세 조조에게 연환계를 가르쳐주어 패하게한 후 유비의 부군사로 임명되었지만 유장의 촉을 칠 때 매복궁에 의해 낙봉파에서 38세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된다. 양양사람으로 자는 사원 시호는 정후임. 
서서(徐庶) : 수경선생 사마휘의 소개를 받아 유비를 찾아가 서서(徐庶) 스스로 모사가 되었다. 하후돈의 대군을 물리친 다음 조조가 어머니를 인질로 필적을 흉내내어 서서를 불러들이자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하고 조조가 있는 장안으로 간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아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자결하니 평생 몸은 위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촉에 있었다. 적벽대전에서 서량으로 간 후 알수없다. 영천사람으로 자는 원직임 
 
조운(趙雲) : 촉의 오호장군인 동시에 맹장임. 자룡 조운(趙雲)은 초기 때부터 유비의 인품에 빠져 공손찬이 망한 뒤 유비의 막하로 들어오게 된다. 의리가 굳고 인자스러운 무인이었으며 창법에 통달하고 무예가 절윤했다.수 많은 싸움에서 장수의 목을 벴으며 당양 장판땅에서 유비의 아들 유선을 단신으로 품에 안은채 백만 대군 사이를 돌파한다. 훗날 나이의 늙음의 지지 않고 단신으로 위나라의 여섯 장수의 목을  베니 위의 장수들이 혀들 내두르며 두려워 했음. 제갈량의 두번째 출사표를 낼 때 병사하자 제갈량이 사흘을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했으며 후주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혼절할 정도로 덕이 많은 장수였다. 상산 진정 사람으로 자는 자룡 시호는 순평후임 
황충(黃忠) : 원래는 장사 태수 한현의 장수였지만 유비가 의로써 설득하여 유비의 맹장이 되었음. 황충(黃忠)은 오호장군의 시호를 얻고 한중땅을 손에 넣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조조의 맹장 하후연의 목을 벤일은 너무도 유명하다.훗날 관우의 복수전에서 오나라의 장수의 목을 베며 돌진했지만 많은 화살을 맞고 군중에서 유비가 보는 앞에 죽게됨. 유비가 혼절하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양양 충전사람으로 자는 한승임.
마초(馬超) : 촉(蜀)서량의 호걸 마등의 첫째 아들. 유비의 아우 장비와 일대격전을 벌이니 천하가 울리고 땅이 진동할정도였으며 무예는 장비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마초(馬超)는 후에 유비에게 항복하여 촉의 서쪽 변방을 맡으니 강족들이 두려워 감히 촉을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촉의 오호장군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부풍의 무릉 사람으로 자는 맹기임. 
 
강유(姜維) : 촉(蜀)유비의 장수로 지용을 두루 겸비한 이로 원래는 위나라의 장수였지만 인물을 알아본 제갈량이 계략을 써 촉나라로 귀순하게 한 후 제갈량의 후계자로 임명된다. 강유(姜維)는 벼슬은 대장군까지 지냈으며 훗날 후주인 유선(劉先)이 위나라로 항복한 후 위장 종회를 이용하여 촉의 부활을 꾀했으나 지병인 신경통으로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여 자결하였음. 천수 사람으로 자는 백약임.
양의(楊儀) : 촉한(蜀漢)의 문신(文臣). 양의(楊儀)는 양양(襄陽) 사람으로 자는 위공(威公). 대소사에 재치 있어 임하여, 제갈양의 출정 중에는 늘 좌우에 모시고 있어, 잔사무는 모두 그의 손에서 처리되었다. 백성과 군사의 피로를 덜고자 석달만큼씩 교대하는 제도를 건의하여 제갈양은 그것을 따랐다. 제갈양이 임종에 유언하여 위연(魏延)이 모반하였을 때에 깨칠 계교를 전하였다. 그리하여 유해를 모시고 무사히 귀국하였는데, 제갈양의 유언대로 중앙의 요직이 결정되자, 장완(蔣琬)은 자기보다 벼슬을 나중하였건만 웃자리에 앉았다고 불평을 하고, 그밖의 불미한 일들이 속속 드러나, 후주가 죽음을 줄 것이로되 감하여 관직을 뺏고 내치었다. 그리하여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스스로 목메어서 죽었다. 
마속(馬謖) : 촉(蜀)마량의 아우로 형과 역시 촉에 충성을 다했으며 제갈량이 특별히 아꼈던 자이기도 하다. 마속(馬謖)은 후에 사마의가 쳐들어오자 촉의 퇴군로인 가정을 맡았으나 사마의의 계략에 빠져 가정을 잃자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목을 베었다. 양양사람으로 자는 유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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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대(馬岱) : 촉(蜀)원래는 마등의 아들 마초의 종제로 낙양으로 간 마등이 조조의 계략에 빠져 죽은 뒤 마초와 조조의 복수전을 결심했으나 실패로 돌아가 마초와 함께 방랑생활을 하다 유비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하고 평생 제갈량의 휘하에서 뛰어난 공적을 쌓는다. 후에 제갈량의 유교를 받들어 촉을 배반한 위연을 진 앞에서 목베는 공훈을 세운다. 서량 사람으로 자는 공대. 

법정(法正) : 촉(蜀)현사 법진의 아들로써 술법과 지략을 겸비했으며 유비가 유장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큰 공헌을 한다. 제갈량의 뒤를 항상 보좌하다가 제갈량이 죽자 통분한 나머지 죽게된다. 고향은 우부풍사람으로 자는 효직이고 시호는 익후라함 

엄안(嚴顔) : 원래는 유장의 장수로 늙은 나이에 촉의 대장군을 맡았다. 훗날 유비를 도우러 가는 장비의 계략에 걸려들어 잡히니 장비가 의로써 설득해 유비를 위해 일하게 된다. 성도에서 병사한다. 상용 무천 사람으로 자는 공덕임 

위연(魏延) : 촉의 맹장.원래는 유표의 장수였지만 유표가 몰락하자 다시 한현에게 가 관우가 한현에게 쳐들어 왔을때 그를 죽이고 유비에게 온다. 제갈량이 위연에겐 반역의 상인 반골이 있음을 알고 죽이려고 했지만 인재를 아까워 하는 유비가 말려 촉에 충성을 다해 싸우지만 제갈량이 말한대로 그가 죽은 뒤 반역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미 거기까지 헤아려둔 제갈량이 마대를 시켜 바로 자신의 진 앞에서 마대의 불의의 일격을 받아 죽게된다. 의양사람으로 자는 문장임 

유봉(劉鳳) : 원래는 구봉이었지만 유비가 양자로 받아들임. 유비를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고 공훈을 세우지만 후에 관우를 구하지 않은 죄로 참형을 당해 죽는다. 평원사람으로 자는 공산임. 

장완(將琬) : 촉의 중진으로 제갈량이 출사한후에 내정을 맡아 식량과 군사를 담당했으며 제갈량이 죽자 승상이 되어 촉을 다스렸음. 영릉 상향사람으로 자는 공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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