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배기유머 > 고사성어 > 신라 > 19대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참고] 백제: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고구려:장수왕 중국:5호16국, 남북조(南北朝)

서기 417년에 눌지가 즉위하였는데, 왕호를 마립간(통치자라는 뜻)이라 하였다. 

내물왕 37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후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몰래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어 고구려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사람에게 부탁하기를,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보거든 바로 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사람이 올 때 눌지를 시켜 맞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은 눌지의 용모와 기상이 밝고 귀하게 생겨 군자의 모습이 있슴을 보고, 

"그대 나라의 임금이 나에게 그대를 해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가 없구나." 

하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눌지는 이 일을 원망하여 마침내 실성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2년(서기 418년) 정월에 왕이 시조 묘를 찾아 제사를 드렸다. 이 해에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의 동생 복호가 박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는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미사흔(未斯欣)이 몰래 도망하여 돌아왔다. 

8년(서기 424년) 2월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었다. 

15년(서기 431년) 4월에 왜병이 동쪽 변방을 침범하여 명활성을 포위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7월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18년(서기 434년) 2월에 백제 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고, 9월에는 흰 매를 보냈다. 10월에 왕은 황금과 야명주를 백제에 보내어 답례하였다. 

22년(서기 438년) 4월, 우두군(춘천 지방)에서 골짜기 물이 밀어닥쳐 민가 50여 채가 떠내려갔고, 왕성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떨어졌다. 이 해 백성들에게 우차(소달구지) 끄는 법을 가르쳤다. 
 
24년(서기 440년) 왜인들이 남해변방을 침입하였다. 
 
28년(서기 444년) 4월에 왜병이 10여 일간 왕성(금성)을 포위했다가 양식이 다하자 돌아갔다. 이 때 왕이 군사를 내어 이를 추격하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병가에서 말하기를 궁한 도적을 쫓지 말라 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적을 쫓지 마십시오." 

그러나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기병 수천 명을 이끌고 독산 동쪽까지 따라가 적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장수와 군사의 반 이상이 죽게 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피하니, 적이 두 겹 세 겹 포위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안개가 자욱이 끼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본 적들은 신의 도움이 있다 하여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39년(서기 458년) 2월에 지진이 일어나 왕성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그 해 8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망부석(望夫石) 설화

신라 초기 내물왕이 즉위한지 36년 경인(庚寅, 390 A.D)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표로 왕자 한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므로, 셋째 아들 미해(美海)를 보냈더니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 눌지왕 때에 고구려가 화친한다는 이름 아래 왕자 보해(寶海)를 보내 달라고 하므로 부득이 하여 눈물을 머금고 보냈더니, 역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눌지왕은 아우 둘을 남의 나라에 두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를 안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왕의 동생 미사흔 (未斯欣)을 데리러 간 박제상(朴堤上)이 왕자를 구출했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왕에게 환심을 산 후 미해를 신라로 귀국시킨 박제상은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왜왕이 박제상에게 미해를 빼돌린 이유를 묻자 제상은 자신은 신라의 신하지 왜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왜왕은 왜국의 신하라 한다면 상을 주겠다고 하자 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제상은 왜왕에게 다리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는 형벌, 뜨거운 쇠 위에 세워놓은 형벌 등을 받고, 결국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 뒤에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령의 신모(神母)로 모시고, 이를 소재로 지은 노래가 '치술령곡'이다.
 
[출전] '삼국사기' 권45, '삼국유사' 권1 '내물왕 김제상', '문헌비고', '동국통감', '일본서기' 등에 각각 실려 있으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